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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를 보고 (다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6:49
조회
334

다솜/ 미디어 활동가


"자존심이 밥 먹여주냐."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버려야 하고,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밥그릇을 냅다 집어 차버릴 용기를 지녀야 한다.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우리는 힘겨운 숨을 쉬고 있다. 영화 <다이빙벨>의 상영과 관련해 시작된 부산시와 부산국제영화제의 갈등을 보며, 어떻게 권력이 예술의 자존심을 망가뜨리는지 처참한 심경으로 바라보게 된다. 뿐만 아니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GR1이 그린, 'Big sister is watching you'라는 제목의 대통령을 풍자한 그래피티는 "민원이 있었다"는 이유로 지워졌다. 2014년 당시의 화두였던 카카오톡 사찰을 주제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물론 작가와 사전에 그 어떤 협의도 거치지 않았다.


시대의 우울이 예술을 잠식해오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새삼 예술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지 여러 번 반복하여 질문해보게 된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황폐해져간다고 느낄수록 가슴속 질문은 더욱 더 강렬해진다. 누군가가 예술을 가리켜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했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 만난,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동주>는 내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스크린으로 복원된 시인 윤동주는 그야말로 '곱다'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끊임없이 고뇌하는 곱고 연약한 심성을 가진 사람. 수줍음 많고 순수하며 부끄러움에 예민한 감각을 지닌 사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했던 그는, 꿈을 가질 수 없는 어둠의 시대를 어떻게 호흡했을까.


영화에서 그는, 일본 유학을 앞두고 창씨개명을 한다. 이제 윤동주가 아니라 히라누마 도쥬가 그의 이름이다. 이름을 가질 수 없고 언어를 가질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던 그는, 우연히 친구의 소개를 받아 그토록 한 번 만나고 싶어 하던 젊은 날의 우상 정지용을 마주한다. 어두운 시대에 절망하며 글쓰기를 접어두고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정지용은 윤동주에게 말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위정자들이 ‘염치불고하고’ 활보하는 시대, 영화 속 정지용이 내뱉은 이 한 마디는 시대를 초월하는 호소력을 갖는다.


일본에 가 유학생활을 하던 윤동주는 항일운동에 가담한 죄로 일본 형사에게 끌려가 고초를 당한다. 그의 시에서 불온한 사상이 감지된다는 형사에게 윤동주는 항변한다. 시어는 하나하나 따져가며 읽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나 자존심 강한 시인의 자기변호는, 패색이 짙어져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던 숨 막히는 군국주의의 분위기 앞에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랬던 윤동주가, 예술을 검열하지 말고 즐겨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통하지 않는 작금의 현실까지 살아 숨 쉬고 있었다면 과연 어떤 심정으로 이 풍경을 바라보았을까.


10_26_51__56bd34db10b37[S614,410-].jpg사진 출처 - 씨네21


윤동주는 춥고 배고프고 아픈 후쿠오카의 형무소에서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가 이토록 쉽게 쓰여진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스스로를 자책하면서도 그는 계속해서 글을 쓴다. 숨 쉬기조차 괴로운 시대, 글쓰기는 그가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몰입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의 글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절망적인 시대상황 속에서 처연하게 피어난 꽃이기에 더욱 더 깊은 감명을 준다.


언어를 가질 수 없는 시대에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고 글을 썼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에게는 존재를 건 저항이 아니었을지, 생각해본다. 글쓰기를 지속하는 것이야말로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와 같은 행위가 아니었을지, 생각해본다.


왜 세상살이는 예나 지금이나 이다지도 욕될까. 욕되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세상을 위해서는, 너무 심각하게 굴 것 없이 긴 호흡을 가져야겠다고. 지치지 말아야겠다고. 언어를 빼앗긴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글을 쓰고 친구들을 격려하며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영화 <동주>가 내게 가르쳐준 삶의 태도이니까. 그러면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싸늘하게 죽어간 1800명의 삶을 생각해본다. 윤동주 만큼이나 귀한 1800명의 사람. 그들 삶의 서사를 헤아려본다. 예술이 주는 선물은 이런 것이다. 공감 역량과 감수성의 확장. <동주>는 이렇게 나에게 여러모로 뜻밖의 위로와 선물을 안겨주고 간 셈이다.


이 글은 2016년 3월 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