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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행진 (다솜)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7:33
조회
377

다솜/ 미디어 활동가


이 시대 청년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년작)을 떠올렸다. 4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청년들이 살아가던 모습은 어땠을지 다시 한 번 제대로 관찰해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청년들의 삶은, 과연 지금과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달랐을까.


우선 <바보들의 행진>은 입영을 앞둔 청년들이 신체검사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겨우 속옷만 하나 걸친 벌거벗은 몸이 화면을 메운다. 가진 거라곤 맨몸뚱이밖에 없는 청년들의 이미지다. 이어서 장면은 청년들이 서둘러 미팅을 조직하는 모습으로 전환된다. “꿈에서 아직 덜 깬 아이들은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듯 짝짓기에 몰두했”다던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이라는 곡이 저절로 생각난다. 혐오감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경찰이 긴 머리를 단속하던 권위주의 시대, 병태와 영철은 혐오스러운 장발을 하고 있다는 명목으로 경찰서에 끌려간다. 둘은 경찰의 훈계를 듣고 있는 와중에도 혹여나 미팅 시간에 지각이라도 할까 벌벌 떤다. 그러던 두 사람이 경찰의 감시를 피해 도망간 곳은 ‘낙궁’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미팅의 성지다. 즐거울 락에 집 궁이라는 한자를 떠올리게 하는 ‘낙궁’은 상실감과 우울이 청년들을 잠식한 시대, 유일한 즐거움은 연애가 아니었을까 하는 궁금증마저 심어준다. 그도 그럴 것이, 술집에서 그야말로 술이 고주망태가 되어버린 주인공이 읊조리는 대사가 바로 “내 힘으로 할 줄 아는 건 하나도 없어요”, “우리는 쪼다예요” 같은 자조이기 때문이다.


M0010006_KR__04_march_of__5[S614,410-].jpg사진 출처 - 씨네21


사귈 듯 말 듯 끊임없이 친구와 연인 사이의 긴장을 넘나드는 병태와 영자의 모습은 연애를 할 야성도, 돈도, 여유도 없어 ‘썸 탄다’는 말이 유행어가 되어버린 작금의 현실과 기묘하게 겹쳐진다. 결혼을 꿈꾸는 영자에게 병태는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고, 그런 병태에게 영자는 철학과 나와서 어떻게 돈을 버냐고 묻는다. 그리고 둘은 “이 다음에 우리들의 시대가 왔을 때” 결혼을 할 거라며 깔깔 웃는다. 영자에게 키스하려다 거절 당한 병태는 “지금 키스하는 놈들 다 뒈져라!”라고 외치며 거리를 질주한다. 이 장면은 “몽땅 망해라”라고 연애에 빠진 사람들에게 엿을 날리는 10cm의 ‘봄이 좋냐’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파서일까. 여자로 태어난 걸 후회한다는 대사를 들으면서는 얼마 전 강남역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 사건이 떠오르고, 영자가 병태와 데이트하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는 장면에서는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삶을 마감한 청년이 떠오른다. 피를 팔아 돈을 버는 영화 속 청년들을 보면서는 가진 거라곤 몸밖에 없는 청년들이 가야 할 곳은 과연 어디인지, 질문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은 스크린 안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청년 문제는 곧 나의 문제이고 이 시대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가는 내 친구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영화는 해피엔딩을 제시하지 않는다. 가진 건 몸뚱이 뿐인 청년들. 앞으로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청년들.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라, 그 시대 특유의 잿빛 분위기에 가위눌려 오직 빨리 취하는 것이 목적인 음주를 하는 청년들을 보며 가슴이 아려온다. 그런 청년들을 기다리고 있는 종착지는 결국 군대와 자살이다.


<바보들의 행진>에 등장하는 청년들은 모두 대학생이다. 대학이 취업학원이 되어버린 시대, 그렇게 취업준비를 열심히 하고도 일자리를 얻기가 어려워 많은 이들이 무력감에 빠져버린 요즘을 생각한다. 자식이 짊어진 짐과 함께 미숙련 저임금노동으로 내몰리고 있는 부모들을 생각한다. 그런 잔혹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대학생이 될 기회조차 박탈당한 청년들을 생각한다. 그러다가, 살아 숨 쉴 기회마저도 빼앗겨 일찍이 스러져가버린 더운 목숨들을 생각한다.


이 글은 2016년 6월 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