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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3년 전 미얀마 메이크틸라에는 무슨 일이? (이동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7:49
조회
677

이동화/ 아디(Asian Dignity Initiative,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사무국장


우 민 쉐(U Min Shwe)씨에게는 지금 이순간이 믿기질 않는다. 새벽 2시를 넘어 3시를 향해 가고 있는 지금 우 민 쉐씨는 미얀마 정글 속 늪에 몸 절반을 숨기고 나머지 절반의 몸은 늪 주변 수풀에 숨긴 채 벌써 12시간째 숨어 있다. 뱀과 벌레들이 몸을 타고 지나가고 주변의 모기 등 곤충이 온 몸을 공격하지만 숨소리조차 크게 내쉴 수 없다.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도 함께 늪 속에서 버티고 있다. 급하게 도망쳐 나오다 보니 가지고 온 것은 모포 한 장뿐이다. 얼마나 더 숨어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리 멀지 않은 곳, 본인이 수십 년 동안 살아왔던 집과 마을은 이미 화염에 쌓여 새카맣게 탔고, 광기에 휩싸여 장검과 칼, 오토바이 체인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수십 명의 스님과 불교도들은 이 새벽까지 무슬림 마을 사람들을 찾으려 괴성을 지르고 있다. 공포와 두려움에 전혀 잠이 오지 않는다. 만약 저들에게 발각되면 산채로 불에 태워지거나 무시무시한 칼이 몸을 뚫고 나갈 것이다. 우 민 쉐씨와 가족들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이 꿈이길 바랐다.


20161011web02.jpg불에 탄 모스크와 Chan Aye Tar Ya 지역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2016년 9월 13일부터 10월 5일까지 아디는 최초의 현장 활동으로 미얀마 메이크틸라를 찾았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메이크틸라 학살 사건을 들을 수 있었다. 메이크틸라 학살사건은 지난 글에도 소개했지만 2013년 3월 무슬림 금은방 주인과 불교도사이의 언쟁이 폭력사태를 유발했고, 한 승려가 무슬림 패거리에게 살해된 후 미얀마 정부의 방관과 일부 불교민족주의자들, 승려들에 의해 3일 동안 이어진 사건으로, 정부 발표에 의하면 43명이 살해되었고, 모스크 37곳, 집과 건물 1300채가 불탔으며, 이재민이 1만 3천명 발생하였다.


학살이 벌어진지 3년이 지났지만 이야기를 이어가는 우 민 쉐씨의 눈빛은 여전히 공포에 떨고 있다. 2013년 3월 22일 아침이 되어 다행이도 경찰들이 마을에 도착하였다. 정글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우 민 쉐 씨와 그 가족들은 경찰차를 타고 No.1 Police station으로 이동하였다. 정글에서 빠져나와 경찰차에 타는 와중에도 무슬림들은 학살자들의 공격을 받았지만 경찰은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온 마을이 타버린 상황이었기에 우 민 쉐씨 가족은 메이크틸라 제1고등학교에 마련된 임시피난천막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먹고 마시고 씻는 모든 것이 부족하고 불편하였지만 죽음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것에 대해 감사해 했다.


그리고 한 달 뒤, 우 민 쉐씨 가족은 정부가 관리하는 IDP(Internally Displaced Persons, 국내피난민)캠프에 수용되었다. 그곳에서 모든 생활은 통제되었다. 캠프 외부로 출입이 통제되고 밤에는 통금시간이 있어 캠프 내에서도 이동이 불가능했다. 정부 측으로부터 5일에 한 번 쌀, 콩, 오일 등을 지급받았고, 해외 무슬림기구로부터 고기와 참치 등 영양가가 있는 식량을 받았다. 간간히 들어오는 외부 구호단체들의 구호품목으로 옷과 이불들을 받았다. 가로 2미터 세로 2미터 남짓의 작은 임시처소에 5~10명의 1가구가 지냈다. 수천 명이 머무는 캠프에 화장실은 고작 15~20개였다. 우기에 비가 많이 오면 화장실이 넘치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래도 이 곳에서 우 민 쉐씨 가족은 무려 3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현재 우 민 쉐씨는 학살이 있었던 자신의 마을에 재정착하였다. 학살 전에는 소와 염소를 키웠지만 지금은 일이 없다. 가장이 일이 없자 큰 아이인 민트(Myint)는 다른 먼 도시 따웅지에 가서 일을 하고 돈을 보내오고 있다. 학교에 다녀야 할 아이들은 6살 아이 한 명만 학교에 다니고 나머지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재정착한 집은 비가 오는 우기만 되면 폐수들이 집 안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비가 많이 오는 밤이면 잠을 잘 수가 없다. 우 민 쉐 씨의 악몽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61011web03.jpg재정착한 Chan Aye Tar Ya 모습
사진 출처 - 필자


미얀마의 국민 대다수는 불교도이다. 정치적으로 오랜 군부독재의 지배를 받았지만 2015년 11월 민주적 선거를 통하여 아웅산 수치 여사와 NLD가 의회의 다수당이 되어 절차적 민주주의의 토대는 마련하였다. 또한 시장경제는 빠르게 퍼져서 외부로부터 자본과 상품이 물밀 듯이 미얀마로 유입되고 있다. 미얀마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급변하는 시기에 있다. 하지만 종교적으로는 반이슬람정서와 민족불교주의가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다수의 종교가 소수 종교를 탄압하고 차별하며 배제할 수 있는 정당성을 주고 있다. 물론 다수의 미얀마인들이 메이크틸라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지지하지는 않았다. 학살관련 인터뷰를 진행하다보면 당시에 본인의 위험도 무릅쓰고 무슬림 피해자들을 적극적으로 돕고 피할 곳을 마련해준 많은 승려와 불교도인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미얀마 전반적으로 강화되는 반이슬람주의와 민족불교주의를 압도할 수준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아디는 이번 현장 활동을 통해서 학살의 직접적 피해자와 목격자, 관련 전문가들 약 30명을 만나서 당시의 상황을 청취하였다. 더불어 직접 피해자들의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미술심리치료를 진행하였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현지활동가들과 공동으로 교육을 진행하고 인권감시단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현지활동에 대한 최종 보고대회는 11월에 가질 예정이다. 미얀마에서 활동을 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수 천 킬로 떨어진 메이크틸라에서의 학살과 한국의 시민사회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한국사회 내에서 보이는 반이슬람정서, 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 선동, 폭력은 메이크틸라 학살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그리고 현지 활동을 정리하고 평가 중인 지금은 ‘한국 사회는 학살과 같은 잔혹한 폭력에서 자유로운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 글은 2016년 10월 1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