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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당신의 오지랖 - 연규련/ CJB청주방송 노조 상근활동가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4:16
조회
445

연규련/ CJB청주방송 노조 상근활동가



“결혼 하셨어요?”
[목에 가시] 필진들이 다 같이 만나는 자리였다.
처음 보는 얼굴도 있고, 알고 지내온 얼굴도 있고, 웹진에 올라오는 글을 보며 궁금했던 이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나게 된다니 개인적으론 부끄러웠지만(난 소심한 사람이란 말입니다-_-) 한편으론 쿵짝쿵짝 방정맞을 정도로 가슴이 설레였다.

사무실과 가까운 식당에 둘러앉아 “제가 누구누굽니다” 소개를 하고 “아 그렇군요”, “이름이 그래서 여자분 인줄 알았어요”, “선생님이 일하시는 곳은 언제부터...”같은 말을 하며 안면을 익히던 중, 누군가 옆자리의 사람에게 물었다. “결혼 하셨어요?”, “여자친구 있으세요?” 질문을 받은 어떤 사람, 민주노동당의 무슨무슨 교육을 받았다던 그는 “그런 질문, 동성의 친구를 사귀는 사람들에겐 매우 곤란한 질문이라더군요” 라며 설명을 한다. 사귀는 사람의 성별을 질문하는 쪽에서 먼저 정하고 묻는 질문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러고도 그 이후에 몇 번 더, 똑같은 질문이 다른 사람을 통해 반복됐다. “결혼하셨어요?” “남자친구는?”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만났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통의 화제를 찾기 위해 또는 순전히 궁금해서라도 이런 저런 개인적인 질문을 한다. 나이, 결혼, 애인, 직장, 하는 일, 사는 곳, 전공을 물어볼 때도 있고, 결혼을 했다면 아이는 몇 명인지 묻기도 한다. 비슷하거나 공통의 관심사를 찾았을 때 어색한 만남은 금새 활기를 찾는다. 각자의 결혼과 직장과 육아문제에 대해 이야길 하며 고민도 나누고 정보도 얻는다. 그러면서 친해진다. 그렇다. 그러기 위해 위와 같은 질문이 필요한 것이다. 당연하다, 나도 그런 질문을 매일 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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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5일 '목에 가시' 필진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것 말곤 도대체 시작할 말이 없는 걸까? 란 생각이 들었다.
“저기...학번이...” 라거나 “결혼하셨어요?” 또는 “결혼 안하세요?” 라는 말 말고는 그 사람을 알만한 키워드가 정말 없는 걸까? 사람을 알아 가는데 나이와 학번과(나이랑 학번은 다른 경우가 많아서 이걸 설명할 땐 또 한나절 걸리기도 한다) 전공과 애인의 유무와 결혼은 언제 했고, 아이는 몇인지, 아이가 없다면 왜 없는지, 언제 낳을 계획인지...가 정말 중요할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이런 궁금증은 개인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시작된 것이기도 한데,
버릇이 없고, 예의범절을 모르며, 싸가지를 실종한지 오래된 “나”의 경우(이 얘긴 그런 질문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한 나에게 누군가 너는 그렇다며 해준 말이다) 결혼과 나이, 집안에 대한 모든 질문이 사생활의 영역이라 생각해 질문 받는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결혼한 사람들에게 반대로 “선생님, 이혼은 언제 하실 건가요?” “아이는 왜 낳으셨죠?” “제 나이가 궁금하신 이유는 사적인 겁니까, 공적인 겁니까?” 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들은 기분나빠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 질문이 위의 것들과 무엇이 다른데?

나이에 대한 고정관념도 참 지긋지긋하다.
텔레비전 광고를 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란 카피가 나오면 실컷 동감하며 흥분하고 떠들어 놓곤 광고가 끝나면 옆 사람에게 바로 눈을 돌려 자기한탄인지 푸념인지, 저주인지 모를 소리를 한다. “그런데 아무개 씨, 올해 몇이지?” 그들에겐 이십대만 청춘인걸까? 서른만 넘겼다하면 그가 누구이든 “벌써 그렇게 됐어? 아무개 씨도 이제 늙었구나” 라며 언제나 시든 꽃 취급을 한다. 호기심과 모험으로 좌충우돌했던 이십대를 지나 세상에 대한 적응력이 생기고, 일에 대한 자신감도 인간관계에 대한 나름의 깨달음도 생기는 삼십대 그리고 갈수록 몸도 마음도 넉넉해지는 사십대야말로 만개한 꽃 같은 인생의 황금기가 아닐까, 그런데 그런 황금기의 시작을 두고 ‘꺾어진 칠십’ 이런 허튼 소리만 세뇌시키다니 참 우습다.

지난 주 오랜만에 만난 선배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느라 정신이 없고 바쁘다며 저녁을 먹는 자리에 최근에 사귀었다는 동종업계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선배가 자리를 비운사이 동석한 그와 또 신상에 대한 지겨운 이야기들(-_-)을 나누다가 선배가 자기나이를 뻥 튀겨 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혹시 내가 나이를 잘못 알고 있었나 싶어 자리가 파한 다음 조심스레 물어보니 “이쪽은 자격증이 필요한 것도 전문분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나이 많은 사람이라야 무시를 당하지 않고 대접을 받는다” 고 “그래서 다섯 살이나 올려붙였다” 는 대답을 들었다.

나이를 속일 수 없는 경우라면 어떨까? 학교선생님인 친구 N은 학교운영에 대한 것이나, 학생복지와 관련된 예산에 대한 것들로 견해가 다른 선생님들과 부딪힐 때마다 “N선생이 아직 어려서 잘 모르나본데” 라거나 “N선생 아직 미혼이지? 결혼을 아직 안했으니 저러지” 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그 말은 뭘까, 나이도 어리고 결혼도 안했으니 너는 입을 닫고 ‘결혼한, 나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길 들어라 라는 말일까? 언제는 너도 늙었구나 라더니 이제는 어리다며, 결혼을 하지 않았다며 차이를 두다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라는 얘긴가? 그리고 학교운영이나 학생복지가 선생의 나이나 결혼과 무슨 상관이 있나?

나이 들어간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한다는 것, 나를 닮은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 이런 여러 경험들을 통해 풍부한 감성과 역량을 지닌 인간이 되는 일은 멋진 것이다. 정말 정말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왜 개인을 판단하는 기준의 첫 번째 항목이 되어야 하는가? 왜 남을 비판할 때 쓰이는 무기로 둔갑해야 하는가?
아쉽다, 남들에겐 몰라도 내겐 아쉽고 안타깝고 답답한 일이다.

첨언,
그래도 굳이 내게 나이와 결혼과 애인과 우리 부모님과 기타 등등에 대해 묻겠다면 좋다, 묻는 건 당신의 자유니까, 하지만 나는 답해주지 않겠으니 맞춰보시라, 당신의 오지랖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