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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이라크 난민 가족의 이야기 -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4:38
조회
354

어느 이라크 난민 가족의 이야기
- 요르단에서 함께 한 10개월의 기억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2005년 11월 중순. 요르단에서 아랍어를 배우고 있던 내가 살고 있던 집 아래층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왔다.

너무도 눈이 예뻤던 여자아이 둘,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듯 한 개구쟁이 남자아이 하나, 그리고 쭈뼛쭈뼛 눈치를 보면서 나를 경계했던 3살짜리 남자 아이 하나, 그리고 외부의 노출이 거의 없는 큰딸과 어머니, 마지막으로 배가 산만하고 여타의 아랍인처럼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있던 아빠 아부 아핫메트.

그들이 이사 온 첫날 나는 그들이 이라크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반가워서(나도 이라크에서 2003년, 2004년에 약 1년 동안 있었기에) 저녁에 과자를 한 아름 사서 그들에게 전해주면서 환영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2005년 11월 말. 어느 정도 안면을 익힌 그 집 꼬마 녀석들이 자꾸 내 방문 앞에서 알짱거리면서 내게 놀아달라는 듯 눈치를 보냈다. 나도 그 곳에서 외로웠던지라 아이들을 내 방안으로 불러서 과자를 먹으면서 오직 몸짓 발짓으로 아이들과 놀았다. 아이들과 노는 데에 언어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2005년 12월. 그 집 아빠가 커다란 물통을 들고서 나에게 와서 아주 미안한 듯이 물을 좀 달라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부에서 오는 물은 일곱 식구가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혼자 살고 있던 내게는 조금 남아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 하였다. 그리고 제대로 씻지 못해 온 몸에 피부병이 있었던 아이들도 내 집에서 목욕을 시켰다. 아이들 피부병이 조금 나아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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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꼬마아이가 후세인, 여자아이가 디아나, 처음에는 낯을 가렸다. 조금 지나니 말썽꾸러기
사진 출처 - 필자


일곱 식구가 쓰기에는 물조차 부족해

2006년 1월. 우연찮게 그 집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그 집 아빠는 근처 음식점에서 점원으로 있으면서 약 120디나르(약 17만원)를 받고 있었고, 집값으로 매달 65디나르, 수도세 전기세, 가스비를 합치면 20디나르, 남는 돈은 35~40디나르(5~6만원)이다.

요르단 암만의 물가가 그리 싸지 않다. 그나마 월급이 제때에 나오지 못하면 수일동안 굶기도 했다. 그쯤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던 나는 매주 주말 음식을 준비해서 그들과 함께 먹었다.

2006년 3월. 새 학기가 시작이 되어도 그 집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한다. 이라크 난민이기 때문이다. 요르단 정부에서 이라크 난민 아이들의 취학을 막았다. 아이들은 거의 하루 종일 집안이나 집 근처 반경 20미터 내에서만 놀았다.

왜냐하면 근처의 아이들이 이라크 난민의 아이라고 멸시하고 경시해 밖으로 나가 노는 것을 부모들이 말렸다. 그래서 막내아이는 계속 밖으로 나가서 놀고 싶어 했고, 그럴 때마다 아빠 엄마에게 혼났다.

2006년 5월. 더 더워지기 전에 아이들과 그 집 식구들이랑 남들처럼 공원이라는 곳에 가서 놀아야겠다는 생각에 택시 두 대를 나누어 타고 요르단 암만 내에 있는 큼지막한 공원에 놀러 갔다. 아이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이리저리 사방을 돌아다닌다.

그 집 아빠와 엄마와 나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이리저리 쫓아다니다가 그 곳에 나와 있는 요르단 가족들의 한가로운 모습들을 보면서 ‘이런 모습이 살아가는 건데….’ 하며 한숨을 지었다. 누구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꼭 모두에게 그렇지는 않는다는 걸 느꼈다.

2006년 8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정식학교는 아니지만 NGO가 운영하는 크리스천 미션계열의 학교에서 아이들을 받아주었다. 아이들은 요르단에 온 지 2년 만에 가는 학교인지라 방방 뛰어다녔고, 나도 덩달아 좋아했다.

하지만 그 집 부모들은 아이들이 학교 다니면서 필요한 학용품 구입 걱정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무슬림답게 신이 도와줄 거라며 애써 웃음 지었다. 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암만에서의 체류기간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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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 함께한 2005년 마지막 날
사진 출처 - 필자


2006년 9월.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끝나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마지막 주를 그들과 함께 보냈다. 그 집 아빠 엄마와 큰 딸은 다른 나라로 가기를 원했다. 유럽이나 일부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난민인정제도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그 제도가 수천, 수만 명 중 한 사람이 될까 말까하는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은 어떠한지를 묻곤 했다. 한국은 난민인정 자체가 힘들뿐만 아니라, 설사 인정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이후의 지원이나 도움이 전무하기에 솔직히 “거지같은 나라”라고 했다. 마지막 날, 그들의 울음을 등지고 나는 그들을 떠나왔다. 마음 한 곳에 큰 돌덩이가 맺힌 듯 했다.
희망을 말하기엔 현실이 너무 버거운 이라크 난민

2007년 4월. 한국에 돌아온 지도 5개월이 넘었다. 새로운 일로 많이 바빴기에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다가 이 글을 쓰기로 하면서 그들과 전화를 했다. 다행히 다들 건강하다고 했고, 아빠는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늘어만 가고 있는 이라크 난민에 대한 정책이 바뀌어서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요르단에서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데….”라고 했다. 나는 한참을 가슴 답답해 하다가 힘없이 다시 전화를 하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현재 요르단에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라크인들이 70만 명을 넘었고, 시리아에는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시리아와 요르단을 넘어가고 있는 난민들은 수천 명이다. 그 중에 운이 좋은 사람은 넘어가고 다수는 다시 이라크로 되돌아온다. 운이 좋게 넘어간 사람도 짧은 체류기간이 넘으면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다. 이 뿐만 아니라 이라크 내 난민도 150만 명이라고 한다. 이리저리 합치면 약 400만 명이 넘는다.

아부 아핫메트는 나에게 “…… 알라케림, 일랄리까, 인샬라.”(신은 관대하시다. 신이 허락하신다면 또 보자)라고 이야기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다시 팍팍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