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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보다 못한 ‘인간’ - 장윤미/ 국민대 학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4:37
조회
377


‘개미’보다 못한 ‘인간’
-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


장윤미/ 국민대 학생




얼마 전, 자유권 중 집회시위의 자유 제한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기도 한 지라, 국가의 자의적인 법조문 해석과 공권력 남용에 대한 불만부터 시작해 집회시위의 자유가 정말 있느냐 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로도 이어졌다.

그렇게 집회시위의 자유의 취약점에 대해 사람들이 토론하는 사이, 무수하게 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던 생각은 좀 더 원론적인 문제였다.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국가와 싸울 것이 아니라 민중들을 감응시키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하는 거였다. 공권력이 집회시위를 막는 방향으로 행사될 수 있는 것도 그들을 못마땅해 하는 서민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회나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교통이 통제돼서 짜증나고, 불쌍한 전·의경들 괴롭혀서 나쁘고, 때로는 할 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 취급하기도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수자의 목소리에 감응하지 못하는 사회

한미 FTA 체결이 서민들의 삶에 초래할 위협을 선전하는 집회시위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주의 깊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 (서민들을 귀 기울이게 하는 시위가 되지 못하는 지도) 그런데 하물며 생존을 위해 메마른 거리로 나온 장애인들의 시위가, 한미 FTA를 반대하는 농민들이, 재개발로 쫓겨난 철거민들의 목소리가 들릴까.

나는 가끔 주위 대학교 친구들에게 물어본다. 한미 FTA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른다.”가 대다수다. 이보다 더 중요한 대답은 “물론 농민들이나 몇몇 집단이 피해를 보겠지만 대세가 그런데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어쨌든 경제적으로 혜택을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이들 말이 맞고 틀렸고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대체 왜 우리들은 소수자의 아픔에 감응하지 못할까 하는 거다. 이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누군가는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 이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우리는 왜 단 한 명의 아픔에 같이 울어주지 못하는가. 그 한 명의 아픔을 위해 다 같이 한 걸음 늦춰 보조를 맞춰줄 수는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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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7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한미FTA 무효 범국민대회'
참가자들이 거리행진을 벌인 뒤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보면 흥미 있는 구절이 있다. 한 개미가 두려움이나 즐거움이나 분노를 느끼게 되면, 호르몬이 몸 내부에서 순환할 뿐만 아니라 몸 바깥으로 나가 다른 개미들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이 덕분에, 개미들은 한 마리가 소리치려 하거나 울려고 하면 수백만의 개미가 동시에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 개미도 이러할진대 인간들은 왜 이리 무정한가.

누군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생각. 그렇다면 소수자를 배제한 다수를 위한 사회, 그 다수를 위한 사회 속에서 또 양산될 소수자, 그리고 다시 소수자를 배제한 다수를 위한 사회. 이러한 연산 과정의 사회 속에서 결국은 누가 남을 것이고 그건 무엇을 위한 사회일까.
집단적 고독으로 달려가는 ‘편도티켓’ 아닐지

누군가 ‘우리 모두는 소수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언제나 잠재적 소수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를 버스 속에서 그냥 얌전히 실려 간다. 그렇게 얼기설기한 감수성을 가진 우리들은 결국 집단적으로 고독해지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첫걸음으로, 고통 받는 소수자들에게 감응할 수 있는 감수성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멀기만 하다. 어쩌면 난 그저 한때 타오를 뿐인 젊음의 열정으로 사회의 변화만을 꿈꾸는, 현실의 대세에 감응하지 못하는 젊은이일 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