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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비정규직, 거품과 환타지의 악순환 - 돈 안줘도 일하겠다는 사람들 줄서있다 ? - 김지연/ 방송 작가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4:09
조회
554

김지연/ 방송 작가



때때로 낯선 전화를 받게 될 때가 있다. 모 대학 신방과에 재학 중인 방송 일에 관심 있는 학생인데, 방송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을 듣고 싶다는…. 혹은 방송작가가 되기 위해 방송사에서 운영하는 아카데미엘 다니고 있는데, 도무지 자리가 나질 않는다는…. 아무 일이라도 좋으니 방송 일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함께 일했던 게스트, 진행자, 동료 작가들의 소개로 어찌 어찌 연락이 닿게 된, 미래 어느 때든 어떤 방식으로든 방송일을 하고야 말겠다며 벼르고 있는 예비 인력들의 하소연이다.
환타지를 이용한 방송사들의 상술

대중들에게 직업공간으로서의 방송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유명 인사들과 화려한 연예인들이 연일 드나드는 그 공간에서 그들과 교유하며, 일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다면 분명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을 터이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방송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현실이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는 나중 문제일 뿐 아니라, 실제 일을 해보기 전에 이 같은 현실을 알아채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타 직업공간들에 비해 접근자체가 쉽지 않은 방송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그야말로 환타지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어쩌면 그래서 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방송에 대한 이 같은 환타지적 인식은 방송인력, 특히 작가를 포함한 비정규직 인력들에게는 열악한 노동환경을, 반대로 방송사들에겐 확실하고 안정적인 수익창출 시스템을 보장해준다.

거대 방송사들이 모여 있는 서울엔 KBS, MBC, SBS 등 방송 3사를 비롯해 작가협회, 영상원 등에서 운영하는 방송아카데미들만 대여섯 곳이 넘는다. 이들 아카데미에서는 방송작가, PD, 엔지니어, 카메라맨, 아나운서 등 분야별로 6개월에 각각 100명에서 50명 가까이 되는 수강생들을 모집한다. 작가 만해도 한 아카데미에서 6개월에 100명, 1년이면 200명을 배출한다. 대여섯 곳만 추산하더라도 1년에 1,000명이 넘는 예비인력들이 배출되는 것이다.

6개월에 200만원을 웃도는 수강료는 사립대학 등록금 수준이다. 방송사에서 운영하는 일부 아카데미들에선 수강 신청 경쟁률만도 5:1을 넘어서, 돈 내고 다니는 학원임에도 별도의 면접이나 글쓰기 따위의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그나마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웃지 못할 광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아카데미 들어간다고 해서 모두 방송작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이들 학습기관들이 수강생들의 일자리를 보장해주거나, 그러겠다는 의무감 따위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방송사로선, 수강생들의 지적 욕망, 혹은 방송이라는 준거집단에 소속되고 싶어 하는 이들의 열정을 이용한 그야말로 포기할 수 없는 확실한 수익사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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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쿠키뉴스


환타지에 가려진 방송 비정규직의 이면

(모든 일이 마찬가지지만) 상황이 이렇다보니, 넘치는 공급은 방송사에게 사람 선택의 폭은 넓혀주고, 작가를 비롯한 비정규직 인력들의 평균 노동환경에 대해서는 심각히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부여한다. 자연히 방송작가들은 객관적 노동환경보다 내부경쟁 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고, 결국 방송사 조직 논리에 발목 잡히는 수순으로 접어들게 되는 것이다. (인력의 역량과, 사람에 따라 다르다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논리는 걷어내고 구조에 대한 얘기만 하자.)

사정이 이렇다보니, 무늬만 프리랜서인 방송작가를 비롯한 방송 비정규직들이 각자 처한 노동환경에 대해 갖게 되는 문제의식들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2001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산 모 방송사에서 작가, 리포터, DJ를 비롯한 일련의 방송 비정규직들이 노조를 만들겠다고 나서서 관심을 모았던 적이 있다. 서울에 모여 있는 방송사들에 비해 자체제작프로그램이 상대적으로 적고, 인력규모도 적다보니, 지방방송사들의 노동환경은 당연히 수도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하다. 원고작업은 물론 청취자 선물포장, 차심부름까지 온갖 잡일을 다 해가며 한 달 꼬박 일해 봐야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교통비 정도로 만족해야하는 작가들이 대부분이다. 작가들의 노조결성 움직임이 지방으로부터 태동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지만, 논란을 통해 사회적 관심을 이끌어 낸 것이 그나마 성과라면 성과였을 뿐, 이 문제제기가 현실적인 동력으로까지 이어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필자가 함께 일하던 PD에게 넌지시 지역방송사 작가들의 동향을 전하자, 고민도 필요 없다는 듯 단박에 내놓는 답변이란 이런 것이었다.

“회사가 굳이 피곤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노조소속 작가들을 고용하겠느냐는…. 돈 안줘도 일하겠다는 사람들 줄서있다는….”
돈 안줘도 일하겠다는 사람이 넘친다?

작가들 처지에 대한 이해도 깊고, 작가들과의 동료의식도 비교적 두터웠던 시사프로그램 PD의 이 솔직한 발언은 방송 비정규직에 대한 방송사의 인식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던 것이다. 더욱이 대한민국 방송 비정규직 90%가 집중돼 있는 수도권 인력들은 이 같은 지역방송 비정규직들의 움직임에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그 현실은 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는데, 이런 배경에는 수백, 수천 만원의 원고료를 벌어들이는 상위 5% 미만의 작가들이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작가인력 내부의 심각한 양극화 문제도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요컨대, 이것이 바로 방송이라는 직업공간에 대한 막연한 환타지와 거품이 만들어낸 악순환 구조의 실체일진대, 이런 현실을 과연 노동환경을 포함해 직업적 경쟁력까지 확보한, 수많은 사람들이 몸담고 싶어 하는 매력적인 직업공간이라고 말 하고, 권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방송공간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동시에 자아실현도 할 수 있게 되기를 꿈꾸는 예비 방송인력들이 물어오는 질문들 앞에서 내가 난감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