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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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젊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젊은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서동기(인권연대 간사), 손상훈(교단자정센터 원장), 송채경화(한겨레21 기자),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상재(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이현정(꽃씨네농작물 농부), 이회림(○○경찰서), 허창영(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윤요왕/ 강원도 춘천의 농사꾼 # 1. "이 연사 힘차게 힘차게 외~칩니다!"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 6월 25일 즈음이 되면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목소리 큰 학생들을 선별해 ‘반공웅변대회’를 했던 기억이 있다. 반공 글짓기, 반공 포스터, 반공 표어 등등 이북 동포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 시키던 작업(?)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데 이름만 바뀌었을 뿐 아직도 이런류의 웅변대회가 남아있었다. 지난 달 어느 저녁, 밥을 먹다말고 바깥사람은 갑자기 뭔 생각이 났는지 깔깔깔 웃으며 낮에 있었던 얘기를 한다. 바로 ‘자유수호 웅변대회’. 자유총연맹에서 주최하는 웅변대회였는데 이것이 예전의 ‘반공웅변대회’하고 내용이 비슷한 것이었다. 한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나와서 웅변을 하던 중에 갑자기 장난감 총을 꺼내 좌중을 향해 ‘두두두두’하며 총쏘는 시늉을 하더라는 것이다. 내용은 한국전쟁 얘기를 하며 뭐 그렇고 그런 주장을 말하는 것이었으리라. 그 날 저녁 우리는 부부싸움을 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 2. 우리 옆 동네 미술(조각)을 하던 나 보다 몇 살 많은 두 부부가 있었는데 작년 00군으로 이사를 갔다. 공교롭게도 그 집 아이와 바깥사람은 학생과 담임 선생님으로 만났다. 아이는 부모의 재능을 이어 받았는지 그림에 남다른 소질이 있었고, 학교 대표로 뽑혀 군대회 미술경시대회에 나갔단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직접 나가서 그림을 그리는 대회가 아니라 학교에서 그림을 그려 언제까지 군 교육청에 제출하면 된단다. 얼마가 지났을까 바깥사람은 속상해 죽겠다고 푸념을 털어 놓는다. 이유인 즉슨 옆 반 선생님이 제출할 그림을 거의 다 그려준다는 것이었고, 아이는 대상을 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도대회에 나가서는 입상도 못 했다고 한다. 왜? 도대회는 학생이 당일날 대회장에 가서 직접 그리니까- 그 날 저녁 우리는 부부싸움을 했다. # 3. 미선이, 효순이가 미군 장갑차에 의해 저 세상으로 가던 해, 월드컵으로 전국이 들썩이던 2002년. 그 해 4월 우리는 결혼했다. 결혼 준비로 온통 분주하던 때, 나는 일본으로 세미나를 가게 됐다. 미군기지 환경오염실태 발표자로 추천되어 난생 처음으로 외국을 나가게 된 것이다. 일본으로 가기 전 부랴부랴 결혼식 준비를 끝내놓고 신혼여행 날짜만 잡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바깥사람은 학교에 얘기를 해서 휴가를 내야 한다고 했다. 여행사에 가기로 한 날 바깥사람이 만나자 마자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진정시키고 들어보니, 교감선생님이 지금은 학기 초라 여러 가지로 바쁘니 나중에 신혼여행을 가면 안 되겠냐고 하더라는 것이다. 울먹이며 가게 해달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알았다며 돌아서는 바깥사람의 뒤통수에 대고 “신혼여행간다고 빠지고 또 앞으로는 출산휴가다 뭐다 빠질거 아냐, 아무튼 우리 땐 안 그랬는데 정말 문제야, 문제”하더란다. 그 날 학교로 찾아가겠다던 나와 안된다는 바깥사람은 예비부부싸움을 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 4. 바깥 사람이 00교대 4학년이던 1999년 어느 날. 며칠 전부터 바깥 사람은 곧 있을 교생실습에 들떠 온통 그 얘기뿐이다. “무슨 옷을 입을까?” “몇 학년을 맡게 될까?” “아이들이 못 생겼다고 하면 어떡하지?”... 교생실습이 끝나기 전 날. 왠일인지 전화를 받지 않다가 오늘 학교 선생님들과 회식을 했다며 내일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다음 날 저녁을 먹으며 그 간 있었던 교생실습 얘기로 바깥사람은 내내 쫑알쫑알 거렸다. 설레임과 벅찬 그 첫 마음을 영원히 잃지 않는 좋은 선생님이 되라는 훈계도 해 줬다. 그런데 그 회식이 있던 날, 같이 갔던 친구 몇 명은 울고불고 했단다. 그 학교에 한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 노래방에 가서 교생실습 나온 여학생들과 강제로 브루스를 추고 더듬고, 술을 먹이고...일명 성추행을 한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선배들 사이에서도 아주 유명한 선생이란다. 내가 조금은 흥분해서 “너도 브루스 쳤어?” 하니, “난 추자고 하는데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어. 괜찮아”한다. 그 날 우리는 예비 부부싸움을 했다. ======================================================================================= 바깥사람은 절대 이런 저런 학교일들이 문제가 되면 안된다며 신신당부를 했는데, 글로 옮기게 되어 미안한 마음도 듭니다. 또한 많은 좋으신 선생님들께도 죄송스럽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학교 곳곳에는 이런 말도 안되는 현실이 있더군요. 나 하나만 잘하면 되겠지 하는 바깥사람에게 다그치기도 합니다. 가끔은 우리 아이를 계속 학교에 보내도 될까? 하는 생각도 들구요. 부모의 한 사람으로, 선생님을 부인으로 둔 남편으로 훌륭하신 선생님들께 깊이 머리 숙여 부탁드립니다. 저희 부부 싸움 안하게 도와주세요.
2017-07-11 | hrights | 조회: 36 | 추천: 0
전종휘/ 한겨레 기자 “두발의 자유를 허하라, 복장 단속을 하지 말라, 함부로 때리지 말라.” 믿기지 않겠지만, 이런 요구들은 1987년 하반기 노동자 대투쟁 때 울산 현대중공업 등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내 건 것이다. 당시 회사 간부들이 작업장 입구에 `바리깡'을 들고 서 있다가 머리가 긴 노동자가 지나가면 붙잡고 그들의 두피에 직접 고속도로를 냈다고 한다. 생산직 노동자들이 옷도 자유롭게 입을 수 없었고, 툭하면 간부들에게 작업장에서 얻어맞았다. 그 때는 6월 항쟁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린 군사독재 정권이 직선제 개헌 약속을 한 직후였는데, 노동자들이 처한 인권 상황은 이처럼 말이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거름 삼아, 20여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우리 사회는 여러 측면에서 많은 진보를 이룬 것처럼 보인다. 시민들의 정치사회적 자유는 확대됐다. 국가권력이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지던 통제도 많이 약화됐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꽃은 싱그러움을 더하고 키도 많이 큰 듯하다. 그 꽃은 법제도와, 일반의 상식 등을 텃밭으로 삼고 자라왔다. 하지만 그 밭에는 독버섯도 여전하다. 분명, 사회의 발전 방향을 보았을 때 뿌리가 뽑혔어야 할 것들이 여전히 꽃 옆에 기생하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되레, 그 꽃이 꽃이 아니지 않을까 싶게 의심하게 만드는 힘마저 느끼게 만든다. 그 독버섯의 이름은 무엇인가? 바로 국가보안법과 집회및시위에관한 법률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그걸 어떻게 표현하고 행동하는지를 법의 이름으로 판단하고 처벌하는 게 바로 보안법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최근 국가보안법 사건 일지 그림 출처 - 한겨레 대한민국 군대와 관련해 이미 인터넷 등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지식을 공개해도 처벌하는 게 보안법이다. 그야말로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식이다. 그런데 6월 항쟁 당시 부산지역 상임집행위원이던 노무현씨가 대통령에 취임한 2003년 이후 보안법으로 구속된 이의 숫자만 이미 140여명에 달한다. 한나라당의 탄핵 뒤 이어진 여대야소 국면에서도 이 ‘리바이어던’의 목숨을 끊지 않은 열린우리당 인사들이 또 다시 평화나 개혁, 대통합처럼 ‘동지는 간 데 없는데 나부끼는 깃발’을 내걸고 재집권을 도모하는 모습은 차라리 코미디다. 때로 미국 추종적인 듯 보이는 공무원들이 유엔과 미국의 철폐 권고를 무시하고 “그럼 간첩은 어떻게 잡느냐”며 이 법을 존속하기 위한 작태를 보이는 것도 심히 불편하게만 다가온다. 보안법의 든 자리가 형법의 난 자리보다 훨씬 더 커보일테다. 집시법은 또 어떤가. 6월 항쟁 때도 웬만한 집회는 대부분 불법이었다. 민주화를 향한 민중의 욕망이 분출되는 매일매일의 현장들이 법적으로는 모두 금지됐다. 심지어 그 해 7월 9일 1백만 명이 모였다는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마저도 형식적으로는 불법 집회였던 셈이다. 지난 4월19일 명동에서 열린 '집시법 불복종 행동' 에 참여한 인권단체 회원들 모습 사진 출처 - 뉴시스 부정직한 국가 권력이 반대의 목소리를 가장 손쉽게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집시법이다. 법 집행의 자의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보안법이나 집시법이나 오십보백보다. 시민의 헌법적 권리와 자유의 확보보다는 행정력 집행의 편의성에 관심이 더 많은 경찰에게 집시법은 참으로 편리한 도구다. 이 법도 현 정권 들어 올바른 방향으로 고쳐졌다거나 개정을 추진한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정권이 생존을 건 한-미자유무역협정에 자신의 생존권이 걸린 이들이 반대시위를 할 때, 이 법은 정권의 뜻을 지키고 반대 목소리를 억압하는 데 가장 앞장섰다. 표현과 집회, 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는 게 보안법과 집시법이다. 민주주의의 꽃이 봉오리를 맺으려는 데 주먹만한 우박을 뿌리는 악법이 바로 이 법이다. 시대가 변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목숨을 부지하는 이 법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들의 숨통을 끊을 자는 누구인가. 대선이 이제 6달도 남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민주 시민이거나 양식이 있는 국민이거나 양심 있는 시민인 우리들이 고민을 해야 할 지점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6 | 추천: 0
당신의 개입이 평화를 재건할 수 있다고 믿는가? - 아프리카의 이라크 '소말리아'의 비극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지난 5월 15일 소말리아 인근 해역에서 "한국인" 선원 4명이 탑승하고 있던 2척의 어선이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무장 세력에 의해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2006년 4월 ‘동원호 납치’ 이후 다시금 한국의 언론에 소말리아가 언급이 되었다. 한국 언론에 따르면 소말리아인근 해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이자, 소말리아는 오래된 내전으로 인하여 나라가 피폐하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유명한 한국 연예인이 자선(?)활동을 위해서 아프리카로 떠날 때 자주 언급이 되는 나라중 하나이기도 한 소말리아에서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약간 뜬금없지만 전 세계의 분쟁지역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는 미국은 소말리아에서 또 무슨 짓을 하고 있을까? 1960년 식민지 해방부터 최근까지의 소말리아의 상황 소말리아는 1960년 유럽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상황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그 이후 바렐 정권에 의해서 1991년까지 독재정권의 시절을 겪었고, 이후 소말리아 내부 부족그룹과 군벌세력에 의해서 법과 질서가 없는 무정부 상태에 놓여졌다. 더군다나 1990년도 초반 엄청난 가뭄과 기근으로 인하여 수백만 명이 아사의 지경까지 갔다가 유엔의 긴급 식량지원으로 인하여 최악의 상태는 모면하였지만 계속되는 군벌간의 전투로 인하여 소말리아는 피폐해져만 갔다. 미국과 유엔은 군사작전을 동원하여 소말리아 대표군벌의 지도자 아이디드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면서 1995년에 미군과 유엔군은 소말리아로부터 철군을 하게 된다. 계속되는 무법, 무정부상황, 군벌간의 전투로 인하여 소말리아는 극도의 사회 혼란상황으로 치 닫게 되었고, 이 상황으로 인하여 1999년에 이슬람 상인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법정연대가 탄생되었고 전체 소말리아 인구의 95%이상이 무슬림인 소말리아의 종교적 조건과 이슬람 상인 자본의 결집으로 탄생한 이슬람법정연대의 영향력은 점차 확산되었다. 이에 자신들의 영향력 감소를 우려한 소말리아 내부군벌들은 반테러연합이라는 것을 결성하여 이슬람법정연대와 대립하게 된다. 미국은 반테러연합에 자본과 군수용품을 지원하였지만, 이슬람법정연대의 영향력 확산을 막기에는 부족하였다. 2004년 인근국가 케냐에서는 유엔의 중재로 소말리아 주요 부족 지도자들이 모여 선거를 하여 소말리아 과도정부가 출범하였지만, 수도 모가디슈의 군벌들도 어쩌지 못하는 무능력을 보이며, 인근 기독교국가인 에디오피아 국경에 위치한 바이도아 지역에서 유명무실한 존재로 남아있었다. 2006년 6월 이슬람법정연대는 수도 모가디슈의 군벌을 몰아내고 수도를 접수하였고, 계속적으로 그 영향력을 소말리아 전역으로 넓혀갔다. 이에 위협을 느낀 에디오피아는 미국의 군사기술 지원과 자금, 군수품 지원과 소말리아 과도정부를 돕는다는 명분으로써 이슬람법정연대와의 전쟁을 선언했고 소말리아로 진군을 하게 된다.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에디오피아 군은 개전 2주 만에 수도 모가디슈를 점령하고 2007년 1월말에는 실질적인 소말리아 전역을 점령하게 되면서 표면적으로 전쟁은 끝난 듯 보였다. 2007년 1월 이후 미국은 아프리카연합(AU, 이하 AU)을 통해서 평화유지군의 명분을 이용하려 했지만, 친미국가인 우간다를 제외하고는 여타의 AU국가들은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고, 소말리아에서 발을 빼려했던 에디오피아 군대는 소말리아에 계속 주둔하게 된다. 소말리아 과도정부는 가시적인 소말리아 평화를 위해 에디오피아 군대의 힘을 비러 각 군벌의 무장해제를 진행하려 했으나 실패하게 되고 에디오피아의 침공 시 교전을 피하고 소말리아 내부로 스며들었던 이슬람법정연대의 세력과 각 군벌은 소말리아 과도정부와 에디오피아 군대를 상대로 게릴라전을 수행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어 소말리아 내부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반미시위중인 소말리아인들 사진 출처 - 재미존   특히나 3월말에 있었던, 에디오피아군과 모가디슈에 자리한 '하위예'부족과의 전투, 이에 기존의 이슬람법정연대의 전투 합류로 인하여 알려진 사망자가 1086명이고 부상자는 4000여명이 넘는 최악의 전투가 발생하였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또한 4월 중순에는 에디오피아 군대와 이슬람 무장 세력과의 교전으로 최소 165명이 숨지고 229명 이상이 부상당했다고 소말리아의 '엘만'인권단체가 발표했으며, 4월 21일에는 모가디슈에서 에디오피아군이 이슬람법정연대 진압작전 중 교전으로 인하여 52명이 죽고 120명이 부상당했다고 알려졌다. 또한 소위 AU의 "평화유지군"이라는 외피를 뒤집어 쓴 우간다 군대 역시 계속적인 소말리아 저항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3월 말의 최악의 전투 또한 그 시작은 우간다 군대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시작이 되었고, 3월과 4월의 교전이 한풀 꺾인 5월 1일에 모가디슈로 진입하였지만, 5월 16일 저항세력의 폭탄공격으로 인하여 우간다 군인 4명이 숨지고, 5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더 큰 문제는 지속되는 에디오피아군과 지역 군벌, 이슬람법정연대그룹과의 교전으로 인하여 모가디슈 전체 인구 중 1/3에 해당하는 35만 명 이상의 소말리아 사람들이 모가디슈를 빠져나와 최악의 피난민의 상황이 되었고, 남아있는 모가디슈 소말리아 사람들도 급성 설사병과 콜레라에 시달리고 있으며 식량과 의약품, 깨끗한 물 등이 모두 부족한 상황이지만 교전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유엔이 지원하는 구조대는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에 소말리아 사람들의 고통은 외형적으로 정부가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 지속되어왔던 무정부상태보다 더한 상황에 처해있다. 아프리카의 이라크 "소말리아" 현재까지의 소말리아의 모습을 보면 2003년부터 진행된 이라크 비극의 역사와 배경은 다르지만 또한 대단히 유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911사태, 테러와의 전쟁 선언 이후 미국은 이라크를 직접 침공하였고, 소말리아는 에디오피아를 내세워 간접 침공하였다. 똑같이 알 카에다라는 테러집단을 침공의 이유로 삼았으며, 현재 지배정부는 미국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에 있으며, 국가 내부의 상황은 침공전보다 훨씬 더 악화되는 양상을 띠고 있다. 결과적으로 작년의 이슬람법정연대 영향력 하에서의 소말리아는 그 어느 때보다 최소한의 질서와 평온이 유지되었던 상황이었지만 미국과 에디오피아, 그리고 소말리아 과도정부에 의해 이마저도 박탈당한 상태이다. 또한 그들 국가의 민중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하며, 또한 생존자체가 삶의 이유가 되어버린 상황에 처해있다. 더욱이 폭력이 폭력을 재생산하는 사회 구조 속에서, 폭력은 민중들의 삶에 내면화되어 사태의 해결방식 또한 폭력에 의존케 한다. 수도 모가디슈에서의 소말리아 아이들 사진 출처 - 잭켈리   현재의 사태를 조금이나마 진정시킬 수 있는 현실타협적인 안으로써, 외세가 배제된 상황에서 소말리아 과도정부가 소말리아내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부족들의 권력을 일정정도 인정하면서 이슬람법정연대까지 포괄하는 연대체를 꾸리는 것이겠지만, 이슬람법정연대를 테러집단이라고 낙인찍은 미국이 그 배후의 영향력을 거두지 않는 이상 이는 이라크에서 당장 평화가 오는 것만큼 이나 힘든 일일 것이다. 이라크의 상황이 그러하듯이 외세가 계속적으로 개입될 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더욱 꼬이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이라크를 통해서 지켜보고 있다. 비극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이유는 그 해답이 없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제국주의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유지, 확장하는데 있으며 그러는 동안 다수의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생존자체가 삶의 이유가 되는 비극의 상황 속에서 지내야 할 것이다. 이라크에서 "평화와 재건"을 자랑스럽게 수행하고, 레바논에도 군대를 파병하려는 한국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소말리아에서 지속되고 있는 전쟁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소말리아인들의 불행과 고통의 책임을 미국과 제국주의, 과도정부, 에디오피아 이런 것들에게만 떠넘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정부도 그리고 그 정부 속에서의 나 역시도 이러한 구조와 연결 속에서 소말리아인, 이라크인들의 불행과 고통에 한 몫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8 | 추천: 0
장윤미/ 국민대 학생 여성학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이런 말을 건네셨다. “우리 다음 한 주간은 상대방에게 그 어떤 외모에 대한 코멘트도 달지 않도록 해봐요.” 타인을 평가하는 외모라는 압도적인 시선이 폭력이 될 수 있음을 감지해보라는 뜻이었다. 일주일 동안 노력해보며, 내가 얼마나 외모로 상대방을 평가해 왔는지를 절실히 느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외모에 관한 언어가 어떻게 잠재적으로 서로에게 폭력이 될 수 있는지, 얼마나 내가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의 기준에 기여해왔는지를 말이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든다. 참 폭력적인 사회구나. 사람들은 사회에 대해 회의적으로 이런 말을 내뱉는다 -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 이때 우리들이 말하는 폭력은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폭력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폭력이 난무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폭력에 대해 그만큼 예민할까. 사이버폭력, 언어폭력, 성폭력 등등 많은 사회적 문제에 폭력이라고 이름붙일 줄만 알지 폭력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할 만큼의 감수성은 현저히 떨어진다. 결국 우리가 눈을 찌푸리고 적극 항거하는 것은 가시적인 폭력이다.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에만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렇게 폭력에 대한 무딘 감수성은 인간관계에서 모세혈관처럼 뻗어있는 수많은 폭력적인 잣대를 보지 못하게 한다.   여성문화예술기획 주최로 열린 `빅우먼 패션쇼-통 큰 엄마와 언니, 그리고 명랑 딸들의 축제' ‘빅우먼 패션쇼’는 외모지상주의 사회에 유쾌한 딴죽을 거는 의미로 기획됐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최근, 한 고등학생이 자신의 심한 여드름에 대한 고민으로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유서에는 자신을 비하하는 내용과 친구들의 놀림으로 괴로워한 흔적이 있었다. 이 죽음에는 그 어떤 가치보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 그걸 기준으로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폭력을 행사하는 슬픈 사회의 모습이 있다. 과거, 폭력이 눈에 보이는 독재시대와는 달라졌다. 훨씬 더 복잡해진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 안에 폭력을 발설할 수 있는 수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고, 자신이 폭력을 당하면서도 그대로 순응한다. 그러다보면 우린 우리가 왜 불행한지도 모른 채 그냥 이게 삶이라고 자위하며 그럭저럭 살아가다 죽을지도 모른다. 또 견디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우리들은 폭력에 있어 자신이 잠재적 가해자이자 피해자인지 알지 못하며, 사회가 피폐해져 간다고 잠시 애도하고 말 뿐이다. 오늘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친구에게 “살쪘구나. 살 좀빼” 그렇게 말하며 듣는 당사자도 모르게 상처를 입혔을지도 모른다. 또 스스로 다이어트 강박에 휩싸여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젠 나도 느낀다. 그건 곧 잘못된 사회의식을 공고하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야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폭력을 감지하기 위해. 우리도 알지 못하게 의식화된 것에 대한 검증과 비판의식 없이는 이 보이지 않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7 | 추천: 0
“너무나 아프지만 기억해야만 하겠다.” - 영화 ‘거북이도 난다’를 보고 강유미/ 수색초등학교 교사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들의 가장 큰 매력은 ‘우화성’에 있다. 우화는 그 자체로 현실을 의미하지 않지만 우화의 비틀기와 풍자성은 현실적 요소를 바탕으로 한다. 아이나 동물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 리얼하고 예리한 ‘촌철살인’이 된다.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사회에 적당히 길들여지고, 적당히 악해진 어른 세계는 순수한 동심의 시선에 더욱 더 굴절되어 드러나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다”라는 워즈 워드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아이들의 영혼은 그 사회의 시금석과도 같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노벨 평화상을 받은 엘리 위젤이 말한 것처럼 “아이들의 죽음은 신의 죽음과 같다.” 사회와 어른에게 있어서 아이가 갖는 상징성이란 바로 ‘희망’이기 때문이다. 어떤 최악의 고난의 상황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지독한 현실 속에서도 아이는 자라주길 바라는 것이다. 연약하지만 결코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꽃으로. 영화 ‘거북이도 난다’라는 제목은 그래서 더욱 역설적이다. 걷는 것조차 느릿하고 위태로운 거북이가 날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날 수 있다는 신념과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비현실적인 영화제목이 암시하듯 아이들이 머무는 현실은 영화 내내 보여지는 진흙탕처럼 질퍽하고 끔찍하기 그지없다. 소수민족으로 핍박받아온 역사를 고스란히 견뎌온 쿠르디스탄 지역의 쿠르드계 감독인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 본 경험 없이 그저 영화가 좋아서 이란의 유명한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조감독을 자원한다. 그러나 그는 키아로스타미처럼 사색적이고 고요한 성찰이 담긴 영화를 만들 수가 없었다. 태생적으로 키아로스타미와 달랐다. 그의 카메라는 아름다운 올리브 나무숲과 황홀하고 풍요로운 대자연보다는 비행기의 폭음과 탱크 잔해, 지뢰나 탄피 등을 놀이기구와 생계수단으로 삼아 살아가는 자신의 민족과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 출처 - 영화 '거북이도 난다'   그의 영상 속의 배경은 신비롭게 눈 덮인 산야와 평화로이 날아오르는 새떼처럼 아름답지만 그 배경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의 풍경은 처참하기 그지없다. 쿠르드족은 권력의 정점을 쥐고 있던 후세인을 위시한 주류 민족으로부터 핍박받던 소수민족으로서 독립을 위해 미국 정부를 지원했다가 이라크 군인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물론 쿠르드족 지도자들의 선택에 대한 평가는 분분했을 테지만 대다수의 쿠르드족의 생존과 독립의 문제는 모든 대의를 넘어서고도 남았을 것이다. 결국 자신들의 삶의 터전에서도 쫓겨나 난민으로 더럽고 초라한 천막 안에서 삶을 영위해 나가야 하는 쿠르드족의 역사는 그야말로 광야에 흩날리는 질기디 질긴 야생초와 다름이 없다. 그들이 태어나 살아가는 곳은 다름 아닌 이란과 이라크 사이의 국경지역. 서로 넘어오기만 하면 총을 갈겨대고 강대국들은 앞을 다투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지뢰를 묻어 놓았지만 이곳을 떠나 달리 살아갈 방법도 여유도 없는 쿠르드족 아이들은 목숨을 걸고 지뢰를 캐며 살아간다. 아이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적으로 보호받아야 하며 가장 좋은 교육과 환경 속에서 자랄 권리가 있지만 쿠르드족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정치 싸움과 전쟁 게임에 가장 여린 가슴 속에 씻어지지 않을 상처를 입는다. 지뢰 때문에 두 팔을 잃은 헹고, 이라크 군인들에게 윤간 당한 아그린, 그 악몽의 씨앗으로 태어났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아기 리가,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른 같은 약삭빠름과 흥정하는 법부터 배워야 했던 위성과 같은 아이들을 본다는 것은 영화 감상이 아닌 일종의 천형이나 고문을 감내해야 할 만큼의 고통을 가슴 가득 느끼게 된다.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독재자인 후세인이 땅도, 식량도, 심지어 하늘까지 빼앗아 버렸다고 탄식하지만 구원군으로 여겨졌던 미국에 대한 비판도 드러낸다. 위성은 구세주이며 친구처럼 여겼던 바로 그 미국이 묻어 놓은 지뢰 때문에 자신의 다리를 잃게 된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미군과 탱크 행렬을 차갑게 외면하고 절뚝이며 걸어가는 위성의 엔딩신은 고바디 감독의 정치적 시선을 드러내 준다. 감독 자신의 말처럼 “나의 카메라는 목숨과도 같은 무기”가 된다. 사진 출처 - 영화 '거북이도 난다' 그는 실제로 다리가 없고 팔이 없는 아이들을 배우로 기용하고 탄피가 기괴하게 쌓여있는 곳에서 마치 다큐를 찍듯이 영화를 ‘보여준다.’ 특별한 사건의 창작과 플롯이 없어도 고바디의 카메라는 현실을 고발하고 관객의 머리와 가슴을 내려치는 무기가 되는 것이다. 영화 ‘거북이도 난다’는 매우 정치적인 작품이기도 하지만 영상적으로도 뛰어난 작품이다. 드라마 곳곳에 배치된 상징적인 복선들은 이 영화만이 갖는 아우라적 신비감을 더해주며, 일년에 한번만 눈이 온다는 쿠르디스탄 지역의 눈 덮인 산야 위로 아득히 날아오르는 새들의 비상은 허한 아그린의 눈망울을 더없이 닮아 있다. 가슴을 찢는 듯이 절규하는 여인의 노래와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오를 즈음엔 관객이 받는 천형 같은 고문 역시 끝나지만 가슴 속에 찍힌 화인이 주는 고통은 영원히 계속 될 것처럼 먹먹해 온다. 그리고 중얼거리며 되뇌게 된다. “너무나 아프지만 기억해야만 하겠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5 | 추천: 0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간사 얼마 전 나는 중국 길림성의 연길을 다녀왔다. 05년부터 해서 세 번째 방문이다. 해마다 한국과 중국 조선족 청소년들 간의 교류활동을 펼치고 있고, 나는 그 곳에서 여러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는 터라 조선족 청소년들과는 어느덧 미니 홈페이지 친구 사이가 되었다. 이번에 중국 연길 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 몇 명의 조선족 친구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비행기가 1시간 넘게 연착하면서 2시간 넘게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9개월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라 무척 반가웠고, 2시간 넘게 기다리면서 우리를 환한 얼굴로 맞이해준 조선족 친구들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이 중에 은옥(가명)이라는 연변대학교 학생을 떠올려본다. “은옥아~ 너무 반가워~” “간사님~ 안녕하세요~ 오신다는 얘길 듣고, 이렇게 나왔어요~” “은옥이는 고급중학교 때 모습하고 똑같은데 벌써 대학 2학년생이네~” “그런가요? 하하하~” 은옥이는 연변대학교 조문학부를 다니는 학생이다. 나와는 2년 전 여름, 청소년 프로그램을 통해 만났고, 우리 단체와는 3년 전부터 인연이 닿았던 친구다. 3년 전에 단체에서 연변대학교와 공동으로 진행한 백일장 대회에서 상을 타고, 그 해 여름, 한국 청소년과의 교류 프로그램에도 참여한 후, 3년 째 여름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해온 친구다. 원래 집이 심양이어서 연길과는 기차로 무려 11시간 이상을 달려야 하는 거리임에도 은옥이는 현재 연변대학교 조문학부를 다니고 있다. 중국은 가을 학기가 신학기인지라 2년 전 여름에 내가 은옥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연변대 조문학부 입학을 기다리는 입학생이었다.   지난 5월, 연변대학교 종합청사에서 열린 한·중 청소년 친선평화백일장에서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조선족 청소년 사진 출처 - 필자     “은옥아~ 가을 신학기부터 연변대 조문학부에서 공부하지?” “네” “여기에서 거리가 꽤 멀텐데, 어떻게 연변대를 선택하게 되었어? “음... 작년 봄에 백일장 대회, 그리고 여름에 한국 청소년들과의 교류 프로그램에 참여해보면서 민족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요~” “아~ 그랬구나.” “대학에서 어떤 공부를 해야할 지 많이 방황했었는데, 교류 프로그램들을 경험하면서 조선 문학을 공부해야겠다 싶어졌어요~” “그래. 그럼 은옥이는 언제부터 심양에 살았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고향은 이 곳이 아니에요.” 은옥이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하고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엄마, 아빠가 모두 한국으로 일하러 왔기 때문이다. 두 분 중에 한 분이 먼저 한국으로 오신 후, 이어 또 한 분이 한국으로 오셨다. 이는 은옥이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한국 내에 약 13만 여명의 조선족 분들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만큼 많은 조선족 청소년들의 엄마, 아빠들이 한국에 계신다. 은옥이도 여느 조선족 청소년처럼 부모님을 매우 그리워하고 있었다. “은옥아~ 엄마, 아빠 보고 싶지?” “네~ 두 분 모두 멀리서 고생하고 계셔서 안타까워요~” “심양 집에 한 번도 못 오셨어?” “네~ 한국으로 가신 후, 몇 년 동안 한 번도 못 오셨어요~ 조문학부에서 공부 열심히 해서 나중에 꼭 한국으로 공부하러 갈 거예요~” “그래~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구나~” 백일장 대회에 참가한 도문시 OOO소학교 선생님과 학생들, 도문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측의 남양시와 마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필자   지난 2월, 여수 출입국관리사무소 화재 참사를 떠올려본다. 희생자들 중에는 조선족 동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춘절 명절을 앞두고 10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려고 했던 아들은 불법체류자이며,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관계기관에 의해 부검이 된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약 3만 여명의 조선족 근로자가 불법체류자 신분의 상황 속에서 오늘도 그들은 감시와 단속의 어두운 곳에서 숨어살아야만 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한국인들은 중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여전히 조선족들을 대상으로 사기행각을 벌이고 있으며, 교묘한 방식으로 임금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부모님을 둔 조선족 청소년들은 이러한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오늘날 우리들이 조선족 동포를 대하는 모습을 어떻게 지켜보고 있을까? 그들의 대답을 가만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벌써부터 이번 여름에 만날 은옥이가 보고 싶어진다. 반가운 두 눈빛과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마지막으로 작년 백일장 대회에서 수상한 룡정시 OO소학교 6학년 학생의 ‘병아리’ 시를 옮겨본다. 병아리 애처롭게 삐약삐약 울어대는 병아리 나처럼 엄마 잃고 그리움에 울어대나 병아리야, 울지마 네가 자꾸 울면 한국간 울엄마 생각에 내 눈에서도 마알간 이슬이 똘랑 떨어진단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3 | 추천: 0
윤요왕/ 강원도 춘천의 농사꾼   우리 동네에 3대가 한 집에 살고 있는 집이 있다. 우리 작목반원이기도 한 용이 형(가명)은 몇 번에 걸쳐 이장직을 수행해 온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하루는 개를 잡았다며 단고기를 먹으러 오라기에 점심시간에 맞춰 달려갔다. 이미 동네 아저씨들 몇 분이 오셔서 드시고 있었고, 한쪽에는 젊은 농군들의 상이 따로 차려져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들과 우리 젊은 농군들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아주머니와 형수는 내내 고기를 발려내고 밥과 국을 나르고 ‘국이 식었다’ ‘두릅 좀 더 가져와라’ 버럭 버럭 소리를 지르는 아저씨의 주문에 비위를 맞춰야 했다. 두 분은 우리의 식사가 끝나 상을 물리고 커피를 한 잔씩 돌리고 나서야 주방에 쪼그리고 앉아 식은 단고기에 점심을 드실 수 있었다. 시골에 살면 가끔은 ‘내가 지금 2007년도에 살고 있는 게 맞나?’ 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일이 생긴다. 세월이 뒤로 가는 듯한 느낌, 불합리한 관습과 관행 등 나의 앞선(?)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도 있다. 한편으로는 오랜 세월 선대로부터 다듬어져 온 나름대로의 질서와 법칙이 시골을 유지하고 있는 힘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시골 아낙네들의 삶을 보면 아직도 변함없이 억눌려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아이들의 보육은 물론 두 번의 새참과 세끼의 식사, 농사일까지 슈퍼우먼이 따로 없다. 특히나 노동도 노동이지만 여성으로의 위상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다. 소위 여자는 잘 길들여져야 된다는 남성들의 사고방식은 농촌사회 전반에 걸쳐 여성차별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여성의 지위는 마을단위에서도 나타난다. 마을마다 부녀회가 있는데 역할은 마을잔치나 기타 마을 부역이 있을 때 식사준비가 그것이다. 남자들은 외부 손님들과 술을 마시며 접대하고 부녀회는 음식준비며 설거지 등 뒤치다꺼리를 도맡아 한다. 그래서 잔치 때 외부 손님들 부르지 말고 함께 준비하고 함께 놀고 즐기는 마을 잔치를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 보지만 통하지 않는다. "여성노동자의 삶과 희망"을 주제로 한 사진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으로 트렉터를 모는 50대 농촌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진 출처 - 일다   요즘 우리 동네 인근 5개리 마을이 묶여 농림부로부터 사업을 하나 따 냈다. ‘농촌마을종합개발계획사업’ 5개년 사업인데 어마어마한 돈이 투자되는 사업이다. 5개리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연일 회의다. 마을마다 의견을 모으고 5개리 대표들이 모여서 안을 만들고 이제 시작이니 5년간은 이 사업으로 바쁘게 생겼다. 그런데 추진위원회에 여성추진위원은 없는 거다. 전체 회의에서도 모습을 볼 수 없었고 여성과 관련한 사업도 관심이 없는 듯 하다. 농촌공사 직원은 부녀회의 역할이 크고 여성을 위한 다양한 사업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마을의 대표들은 별 관심이 없다. 이제야 여성 추진위원을 두어야 된다는 얘기가 나온다. 몇 년 전부터 공부방을 하면서 정부 지원사업을 들척거리며 보는데 ‘여성농업인센터’라는 사업을 알게 되었다. 어린이 집을 비롯하여 방과 후 공부방, 그리고 여성농업인들을 위한 상담과 강좌 등 잘 운영되기만 한다면 여성농업인들에게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사업이다. 가사일과 육아, 농사일까지 숨 돌릴 틈 없는 시골 아낙네들이 편안히 쉴 수 있는 쉼터가 되리라 생각하며 준비하고 있다. ‘농촌마을종합개발계획사업’에 종합복지센터를 짓는데 한 층을 여성농업인센터로 만들려고 안도 올렸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농촌 여성들 스스로의 자각일 것이다. 가정에서는 무시당하고 마을에서는 소외되는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자각, 그리고 실천. 그렇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어야 아직도 변하지 않는 가부장적 농촌사회도 조금씩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용이 형네에서는 아직도 거실과 방에서 손주들과 아내, 며느리가 있든 없든 아버님의 담배연기가 피어오른다. 용이 형 아버님은 그것이 가장으로서의 권위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당신! 아이들도 있는데 앞으로 담배는 나가서 피워요!!!” 아버님을 꾸짖는 아주머니의 당찬 목소리를 듣고 싶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29 | 추천: 0
전종휘/ 한겨레 기자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존재양식 자체가 고립을 상징한다. 그게 전부는 아니다. 섬의 슬픔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내재적 가치가 뭍에 의해 폭력적으로 침탈당해온 그 역사 속에 있다. 오키나와가 그렇다. 13세기에 세워진 류큐왕조가 1879년 일본의 침공으로 무너지면서 이 땅에는 피와 화약의 냄새만이 아름다운 해변을 메워왔다. 일본의 자치단위인 현으로 편입된 이후 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일본 본토에 수탈당해야 했고, 전쟁 말기에는 수만명의 현지인이 징용과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온 한국인들과 함께 일본군의 총알받이가 돼 숨졌다. 그렇게 이어진 미군 점령의 역사는 주일미군의 형태로 오늘날까지 진화하고 있다. 지역민들은 주일미군 재배치 문제로 십수년째 가열찬 투쟁을 벌여왔다. 미군의 후텐마 비행장을 헤노코로 옮겨오고 본토의 기지마저 이 곳 오키나와로 옮겨오려는 사업이 논란거리다. 이미 주일미군의 3/4 이상이 몰려있다는 오키나와는 이렇게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군기지 반대투쟁에는 우치난주로 불리우는 정통 오키나와인들이 중심에 서 있다. 이들은 일본 본토 사람들과 생김새부터가 차이가 난다. 얼굴선이 비교적 굵어 다소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오키나와 전체 주민의 30-40% 정도로 추정되는 우치난주들은 스스로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외지인이 “당신도 일본인 아니냐”고 물으면 대단히 기분 나빠 한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이 겪어온 고난의 역사를 여전히 되새김질하며 일부는 일본 정부로부터의 독립을 꿈꾸고 있기도 하다. 섬의 눈물을 헤아리기 위해 그 먼 오키나와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이미 4.3항쟁이라는 역사의 큰 아픔을 겪은 바 있는 우리의 제주도 해군기지 문제로 들끓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해군은 12만평의 제주 남해안을 매립할 계획이다. 해당 지역 해녀들은 완벽하고 항구적인 ‘직장폐쇄’를 당할 처지에 놓였다. 한-미 자유무역 협정 협상 타결로 감귤나무를 바라보며 한숨짓던 지역민들은 해군기지 문제가 불거지며 다시 눈물짓고 있다. 물론 해군기지 후보지에 살지 않는 다른 제주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기지 건설에 따른 지역 경제발전에 은근한 기대를 걸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대상지 가운데 한 곳인 위미1리의 오동옥 반대대책위 위원장은 기지건설을 경제발전으로 연결하는 건 미신이라고 단정한다. “1함대사령부가 있는 강원도 동해시 송정동의 경우 실제 가서 조사해보니 1980년 4월 인구가 1만2500여명에서 지난해에는 5300여명으로 대폭 줄었더라고. 노인네만 남고 젊은이는 떠났다고 그래. 또 송정초등학교 졸업생이 같은 기간 270명에서 38명으로 줄었대. 경제발전은 무슨 경제발전이야.” 지난달 제주 현지 취재를 하면서 주민 인터뷰를 하던 중 뭉툭한 내 콧날이 순간적으로 식초를 뿌린 듯 시큰해지는 경험을 했다. 역시 해군기지 후보지 가운데 한 군데인 화순항의 한 주민이 “위미리건 화순항이건 해군기지를 제주에 지어서는 안된다”고 말했을 때다. 그 때만 해도 서귀포시 강정동이 주민총회를 거쳐 기지 유치를 자원하고 나서기 전이라 위미리 아니면 화순항 둘 중 한 곳에 기지가 세워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던 때다. 그 주민의 말은 연대의 정신을 표명한 것이다. 그림 출처 - 한겨레 그 꼭같은 얘기를 1년여 전 오키나와에서도 들은 바 있다. 후텐마 비행장이 위치한 기노완시의 요이치 이하 시장을 만났을 때다. 시장은 당시 “비행장을 이곳 기노완시에서 빼되 나하시의 헤노코에도 옮겨 짓지 말라. 아예 오키나와에서 나가라”라고 말했다. 요이치 시장의 말이나 화순 주민의 말이나 지명만 다를 뿐. 섬의 슬픔을 아는 사람들은 충분한 면적의 정서적 공감대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최근 종적을 감춰버린 노들섬 맹꽁이를 생각할 때면 기분이 묘해진다. 서울시의 무분별한 땅고르기 작업에 지난해 서식처로 파악된 바 있는 수로가 막히고, 땅이 압착돼 살던 집이 무너져 내렸을 그 맹꽁이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들도 섬은 슬프다고 생각할까? 어딘가에 숨어 자신들에게 연대의 뜻을 밝혀줄 따뜻한 가슴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우린 장마철에야 한번씩 밖으로 나와 울어젖힌다는 맹꽁이들의 삶과 죽음을, 그들의 울음을 통해 확인하기 위해 장마전선이 몰려올 올 7월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2017-07-11 | hrights | 조회: 31 | 추천: 0
어느 이라크 난민 가족의 이야기 - 요르단에서 함께 한 10개월의 기억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원회 간사 2005년 11월 중순. 요르단에서 아랍어를 배우고 있던 내가 살고 있던 집 아래층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를 왔다. 너무도 눈이 예뻤던 여자아이 둘, 한국으로 치면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듯 한 개구쟁이 남자아이 하나, 그리고 쭈뼛쭈뼛 눈치를 보면서 나를 경계했던 3살짜리 남자 아이 하나, 그리고 외부의 노출이 거의 없는 큰딸과 어머니, 마지막으로 배가 산만하고 여타의 아랍인처럼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있던 아빠 아부 아핫메트. 그들이 이사 온 첫날 나는 그들이 이라크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반가워서(나도 이라크에서 2003년, 2004년에 약 1년 동안 있었기에) 저녁에 과자를 한 아름 사서 그들에게 전해주면서 환영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2005년 11월 말. 어느 정도 안면을 익힌 그 집 꼬마 녀석들이 자꾸 내 방문 앞에서 알짱거리면서 내게 놀아달라는 듯 눈치를 보냈다. 나도 그 곳에서 외로웠던지라 아이들을 내 방안으로 불러서 과자를 먹으면서 오직 몸짓 발짓으로 아이들과 놀았다. 아이들과 노는 데에 언어는 그리 중요치 않았다. 2005년 12월. 그 집 아빠가 커다란 물통을 들고서 나에게 와서 아주 미안한 듯이 물을 좀 달라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정부에서 오는 물은 일곱 식구가 사용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혼자 살고 있던 내게는 조금 남아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 하였다. 그리고 제대로 씻지 못해 온 몸에 피부병이 있었던 아이들도 내 집에서 목욕을 시켰다. 아이들 피부병이 조금 나아지는 듯 했다. 남자 꼬마아이가 후세인, 여자아이가 디아나, 처음에는 낯을 가렸다. 조금 지나니 말썽꾸러기 사진 출처 - 필자 일곱 식구가 쓰기에는 물조차 부족해 2006년 1월. 우연찮게 그 집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그 집 아빠는 근처 음식점에서 점원으로 있으면서 약 120디나르(약 17만원)를 받고 있었고, 집값으로 매달 65디나르, 수도세 전기세, 가스비를 합치면 20디나르, 남는 돈은 35~40디나르(5~6만원)이다. 요르단 암만의 물가가 그리 싸지 않다. 그나마 월급이 제때에 나오지 못하면 수일동안 굶기도 했다. 그쯤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던 나는 매주 주말 음식을 준비해서 그들과 함께 먹었다. 2006년 3월. 새 학기가 시작이 되어도 그 집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한다. 이라크 난민이기 때문이다. 요르단 정부에서 이라크 난민 아이들의 취학을 막았다. 아이들은 거의 하루 종일 집안이나 집 근처 반경 20미터 내에서만 놀았다. 왜냐하면 근처의 아이들이 이라크 난민의 아이라고 멸시하고 경시해 밖으로 나가 노는 것을 부모들이 말렸다. 그래서 막내아이는 계속 밖으로 나가서 놀고 싶어 했고, 그럴 때마다 아빠 엄마에게 혼났다. 2006년 5월. 더 더워지기 전에 아이들과 그 집 식구들이랑 남들처럼 공원이라는 곳에 가서 놀아야겠다는 생각에 택시 두 대를 나누어 타고 요르단 암만 내에 있는 큼지막한 공원에 놀러 갔다. 아이들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이리저리 사방을 돌아다닌다. 그 집 아빠와 엄마와 나는 아이들을 챙기느라 이리저리 쫓아다니다가 그 곳에 나와 있는 요르단 가족들의 한가로운 모습들을 보면서 ‘이런 모습이 살아가는 건데….’ 하며 한숨을 지었다. 누구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꼭 모두에게 그렇지는 않는다는 걸 느꼈다. 2006년 8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정식학교는 아니지만 NGO가 운영하는 크리스천 미션계열의 학교에서 아이들을 받아주었다. 아이들은 요르단에 온 지 2년 만에 가는 학교인지라 방방 뛰어다녔고, 나도 덩달아 좋아했다. 하지만 그 집 부모들은 아이들이 학교 다니면서 필요한 학용품 구입 걱정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무슬림답게 신이 도와줄 거라며 애써 웃음 지었다. 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암만에서의 체류기간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다. 가족들과 함께한 2005년 마지막 날 사진 출처 - 필자 2006년 9월.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다 끝나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마지막 주를 그들과 함께 보냈다. 그 집 아빠 엄마와 큰 딸은 다른 나라로 가기를 원했다. 유럽이나 일부국가에서 시행하고 있는 난민인정제도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그 제도가 수천, 수만 명 중 한 사람이 될까 말까하는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은 어떠한지를 묻곤 했다. 한국은 난민인정 자체가 힘들뿐만 아니라, 설사 인정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 이후의 지원이나 도움이 전무하기에 솔직히 “거지같은 나라”라고 했다. 마지막 날, 그들의 울음을 등지고 나는 그들을 떠나왔다. 마음 한 곳에 큰 돌덩이가 맺힌 듯 했다. 희망을 말하기엔 현실이 너무 버거운 이라크 난민 2007년 4월. 한국에 돌아온 지도 5개월이 넘었다. 새로운 일로 많이 바빴기에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다가 이 글을 쓰기로 하면서 그들과 전화를 했다. 다행히 다들 건강하다고 했고, 아빠는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늘어만 가고 있는 이라크 난민에 대한 정책이 바뀌어서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요르단에서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데….”라고 했다. 나는 한참을 가슴 답답해 하다가 힘없이 다시 전화를 하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현재 요르단에는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라크인들이 70만 명을 넘었고, 시리아에는 10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시리아와 요르단을 넘어가고 있는 난민들은 수천 명이다. 그 중에 운이 좋은 사람은 넘어가고 다수는 다시 이라크로 되돌아온다. 운이 좋게 넘어간 사람도 짧은 체류기간이 넘으면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다. 이 뿐만 아니라 이라크 내 난민도 150만 명이라고 한다. 이리저리 합치면 약 400만 명이 넘는다. 아부 아핫메트는 나에게 “…… 알라케림, 일랄리까, 인샬라.”(신은 관대하시다. 신이 허락하신다면 또 보자)라고 이야기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다시 팍팍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41 | 추천: 0
‘개미’보다 못한 ‘인간’ -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 장윤미/ 국민대 학생 얼마 전, 자유권 중 집회시위의 자유 제한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기도 한 지라, 국가의 자의적인 법조문 해석과 공권력 남용에 대한 불만부터 시작해 집회시위의 자유가 정말 있느냐 하는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로도 이어졌다. 그렇게 집회시위의 자유의 취약점에 대해 사람들이 토론하는 사이, 무수하게 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던 생각은 좀 더 원론적인 문제였다.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국가와 싸울 것이 아니라 민중들을 감응시키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하는 거였다. 공권력이 집회시위를 막는 방향으로 행사될 수 있는 것도 그들을 못마땅해 하는 서민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회나 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교통이 통제돼서 짜증나고, 불쌍한 전·의경들 괴롭혀서 나쁘고, 때로는 할 일 없어 보이는 사람들 취급하기도 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수자의 목소리에 감응하지 못하는 사회 한미 FTA 체결이 서민들의 삶에 초래할 위협을 선전하는 집회시위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주의 깊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 (서민들을 귀 기울이게 하는 시위가 되지 못하는 지도) 그런데 하물며 생존을 위해 메마른 거리로 나온 장애인들의 시위가, 한미 FTA를 반대하는 농민들이, 재개발로 쫓겨난 철거민들의 목소리가 들릴까. 나는 가끔 주위 대학교 친구들에게 물어본다. 한미 FTA 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돌아오는 대답은 “잘 모른다.”가 대다수다. 이보다 더 중요한 대답은 “물론 농민들이나 몇몇 집단이 피해를 보겠지만 대세가 그런데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어쨌든 경제적으로 혜택을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이들 말이 맞고 틀렸고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대체 왜 우리들은 소수자의 아픔에 감응하지 못할까 하는 거다. 이 말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누군가는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 이 말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우리는 왜 단 한 명의 아픔에 같이 울어주지 못하는가. 그 한 명의 아픔을 위해 다 같이 한 걸음 늦춰 보조를 맞춰줄 수는 없는 걸까.   지난 4월 7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한미FTA 무효 범국민대회' 참가자들이 거리행진을 벌인 뒤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촛불문화제를 열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를 보면 흥미 있는 구절이 있다. 한 개미가 두려움이나 즐거움이나 분노를 느끼게 되면, 호르몬이 몸 내부에서 순환할 뿐만 아니라 몸 바깥으로 나가 다른 개미들의 몸 안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이 덕분에, 개미들은 한 마리가 소리치려 하거나 울려고 하면 수백만의 개미가 동시에 같은 상태가 된다는 것. 개미도 이러할진대 인간들은 왜 이리 무정한가. 누군가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생각. 그렇다면 소수자를 배제한 다수를 위한 사회, 그 다수를 위한 사회 속에서 또 양산될 소수자, 그리고 다시 소수자를 배제한 다수를 위한 사회. 이러한 연산 과정의 사회 속에서 결국은 누가 남을 것이고 그건 무엇을 위한 사회일까. 집단적 고독으로 달려가는 ‘편도티켓’ 아닐지 누군가 ‘우리 모두는 소수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언제나 잠재적 소수자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모를 버스 속에서 그냥 얌전히 실려 간다. 그렇게 얼기설기한 감수성을 가진 우리들은 결국 집단적으로 고독해지는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첫걸음으로, 고통 받는 소수자들에게 감응할 수 있는 감수성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멀기만 하다. 어쩌면 난 그저 한때 타오를 뿐인 젊음의 열정으로 사회의 변화만을 꿈꾸는, 현실의 대세에 감응하지 못하는 젊은이일 뿐일지도 모른다.
2017-07-11 | hrights | 조회: 39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