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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소통'은 '차이'를 통해 이루어진다 - 강유미/ 수색초등학교 교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1 14:36
조회
784

강유미/ 수색초등학교 교사




인생에서 간혹 마주치는 행복한 순간 중의 하나는 마음에 드는 영화를 발견할 때이다. 가슴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지만 머리 속을 명료하게 만드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머리 속을 텅 비게 만들어 버리면서 심장 근처가 아프도록 물결치며 떨려오는 영화도 있다.

물론 영화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종의 판타지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오거나 이슈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만 5공화국 시절 우민화 정책인 3S(Screen, Sports, Sex)의 하나이기도 했을 만큼 사람들에게 엄혹한 현실을 잊게 하는 자기 위안의 탈출구로 작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과 삶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영화를 보거나 감독이 던져주는 여러 색깔의 갖가지 시선을 따라가며 공감하다 보면 때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삶의 향기가 순간적이나마 달라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영화 ‘말아톤’을 보고 나면 막 세수를 마친 사랑스런 어린아이의 얼굴처럼 말갛게 갠 자신의 영혼과 마주치게 된다. 맞춤법에 어긋나는 영화의 제목은 얼룩말을 좋아하는 주인공 초원이 그림일기의 ‘내일의 할일’란에 마라톤을 말아톤이라고 쓴 것에서 따 온 것이다.

영화 말아톤은 스물 살 청년이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같은 감정표현이나 조절이 어려운 자폐아, 초원의 이야기이다. 이제까지의 영화나 다른 예술 작품은 신체적 또는 정서적 장애인을 다룰 때에 주인공이 지닌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이겨내는 모습을 감동적으로 그리거나,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감정을 가졌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해 왔다.

장애인의 이야기지만 시선은 철저히 ‘일반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영화 말아톤의 시점은 그 반대이다. 정윤철 감독은 우리에게, ‘스스로를 닫아버린 아이’인 자폐아에 비해 정상적으로 말하고 표현하는 것 같지만 사실 숱한 기만과 허위를 만들어내고 그 관계 속에 기대어 살아가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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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영화 '말아톤' 홈페이지


 

경기장의 치어걸들을 보고 단상 위로 올라가 같이 춤을 추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실례가 될 말도 서슴없이 해버리는 초원이가 감정 표현에 장애가 있다는 말은 오히려 어폐가 있어 보인다. 정윤철 감독의 시선이 날카로우면서도 따스한 까닭은 초원이 이 세상 사람과 교감하는 방식이 소위 어른들로 불리는 일반인의 그것과 다만 ‘다른 것’ 뿐이라는 ‘차이’를 드러낸다는데 있다.

극 중 초원이가 낮게 읊조리는 대사처럼 “얼룩말은 다른 말들과 내구력에 차이가 있어 가축으로 길들이지 못한 것”이다. 영화 말아톤은 ‘그들에게는 우리와 다르지만 분명 자신만의 감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과 소통하는 방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정한 ‘소통’은 동일한 것이 아닌 다른 것 간에 이루어질 때 더욱 설레는 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초원의 엄마인 경숙은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20년의 세월이 걸렸음”을 고백한다. 비정상아로 손가락질 받던 아들이 달리기를 할 때만큼은 정상적으로, 아니 비장애아들보다 더욱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마라톤 완주의 꿈을 키웠지만 그 꿈은 초원이 아닌 자신의 위안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소통은 세계선수권 대회를 제패하고도 마라톤을 포기한 코치 정욱이 마침내 초원을 이해하게 될 때에도 생겨난다. 정상적이지만 오히려 꿈을 잃고 방황하는 정욱의 손을 끌어 초원은 자신의 벅찬 심장 박동의 리듬을 들려준다. 감전되듯이 얼어붙은 정욱은 그 순간 그토록 사랑했던 달리기 그 자체와 꿈을 위해 달렸던 자신의 열정을 기억해낸다.

초원 또한 “비 오는 날이 뛰기에는 더 좋지!”라고 기분 좋게 소리치는 정욱에게 굳게 닫혔던 가슴의 문을 서서히 열어간다. 초원에게 정욱은 코치이자, 아버지이자, 같은 꿈을 가슴에 품은 진정한 친구가 된다.

다분히 정윤철 감독의 바램처럼 보이는 이 소중한 소통의 순간들은 초원이 마라톤을 거의 완주하는 장면에도 들어있다. 이글거리던 트랙은 갑자기 초원이 늘 다니던 길과 마트와 전철 안으로 변하고, 오해 때문에 초원을 때렸던 청년들까지 한마음으로 초원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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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은 정욱의 손을 끌어 자신의 벅찬 심장 박동의 리듬을 들려준다.
사진 출처 - 영화 '말아톤' 홈페이지


 

드넓은 평원 위에 한 마리의 얼룩말이 뛰놀고 그 뒤를 무한한 자유와 함께 뛰어가는 초원의 모습은 환상처럼 표현되고 초현실적이거나 마술주의적으로 보이지만 가장 역설적으로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 말아톤의 매력은 달리기를 닮은 리드미컬한 영상의 흐름과 음악, 정교한 카메라 워킹이 멋들어지게 어우러진다는 것이다. ‘나비’, ‘밀애’를 찍은 권혁준 촬영 감독은 초원의 머리카락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의 리듬과 바람과 나무의 숨결까지 잡아냈고, 김준성 음악 감독은 초원의 심장처럼 벅차오르는 감동을 따스하고 서정적인 피아노 선율에 녹여낸다.

정욱과 초원의 교감을 표현한 ‘뛰는 가슴’, ‘대지를 적시는 비’를 비롯한 O.S.T는 대단히 아름답다.

그러나 무엇보다 영화 말아톤을 생동감 있게 뛰어오르게 한 원동력은 억척스러우면서도 자식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자연스럽게 연기한 김미숙과 그녀의 아들 역을 맡은 조승우이다. 아직 어린 나이지만 충무로에서 일찌감치 완벽주의자로 소문난 그는“촬영을 시작할 때만 해도 계산된 연기를 해나갔지만 나중에는 그냥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되기로 했다”고 한다.

별로 변화가 없는 초원의 얼굴 표정으로부터 수백 가지 인상과 감성을 창조해낸 배우, 조승우의 ‘타고난 감각과 신들린 몸의 연기’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