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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미래다 (송채경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7:56
조회
369

송채경화/ 한겨레21 기자


정치인들이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 새누리당 비박계는 지난주 ‘탄핵 동참’에서 입장을 바꿔 ‘박근혜 대통령의 4월 퇴진’ 당론에 동의했다가 유탄을 맞았다. 탄핵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의 핸드폰 번호가 공개적으로 나돌았고 이들은 국민들의 항의 문자와 전화 세례를 받았다. 하루 4~5천통의 항의 메시지가 쏟아져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고 한다. 결국 새누리당 비박계뿐 아니라 일부 친박계 일부에서도 탄핵에 동참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치인들은 오로지 선거 때에만 국민 눈치를 본다’는 통설이 깨지고 있다.


한국은 매일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의 피의자 대통령이 됐다. 그런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는 국민들의 촛불시위는 11월12일 100만 명, 11월26일 190만 명, 12월3일에는 사상 최대인 230만 명을 기록했다. 12월9일 국회에서 탄핵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300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때로 정치학자들은 시위가 많고 격렬할수록 그 나라 민주주의의 후진성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이상적인 민주주의 사회라면 시민들이 시위에 나서기 이전에 정치인들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시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맞는 지적이다. 국민의 손으로 뽑힌 정치인이 국민의 요구를 ‘대의’하지 않는 한국 정치의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여기에 더해 시위는 그 자체로 ‘목소리’일 뿐이지 그 목소리가 실제로 정책을 만들지는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 요구를 정책으로 실현시키는 권한을 갖는 것은 결국 정부와 국회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230만 명의 촛불시위는 대단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서글프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시위는 그 나라 정치권의 후진성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나라 시민들의 건강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폭력 시위가 아닌 평화 시위여서가 아니다.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요구를 담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행위 자체가 그 나라의 역동성과 발전 가능성에 대한 지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촛불시위처럼 시민들의 목소리가 정치권에 압박으로 작용해 정책이 실현되도록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마이클 무어가 2015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다음 침공은 어디?>를 보면, 대학등록금이 무료인 슬로베니아의 사례가 나온다. 슬로베니아에서 한때 등록금을 올리려고 하자 학생들이 데모에 나섰고 결국 등록금 인상은 폐지됐다. 마이클 무어는 이런 슬로베니아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전 세계 최고 수준의 등록금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 대학의 캠퍼스로 카메라를 들이댄다. 영상에 담긴 미국 대학의 모습은 이렇다. 드넓은 잔디밭에 학생들이 한가롭게 거닐거나 열심히 책을 보고 있다. 최고수준의 등록금에 허덕이는 나라의 대학치고 지나치게 평화로운 모습이다. 슬로베니아의 대학생 데모 영상과 평화로운 미국의 대학 캠퍼스 영상을 대조하면서 무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필요한 것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00500514_20161203.JPG지난 3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6차 주말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세월호 7시간'을 밝히자는 의미로 오후 7시에 맞춰 소등을 하고 있다. 소등 전(왼쪽)과 후.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런 의미에서 현재의 한국에서 촛불시위가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우선 시민들의 목소리가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정치권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작용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 자체가 변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은 정부와 권력자들이 시위나 집회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놓은 탓에 ‘시위=극렬 좌파’라는 인식이 여전히 깔려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도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고 함께 분노했다. 그리고 그동안 잊고 있었던 다른 소수자들과도 연대했다. 사람들은 다시 세월호를 얘기하기 시작했고, 여성의 목소리, 청소년의 목소리, 장애인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 나왔다. 촛불시위는 또한 미래의 한국을 이끌어갈 아이들에게 시민들의 함성을 직접 보여주고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경험의 장을 제공했다. 여기에 더해 국민의 요구가 실제로 관철된다면, 이 성공의 경험은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자산이 될 것이다.


이것이 한국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사람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시위를 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단지 불편함만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국민들에게 필요한 건 거리에 섰던 기억을 되살려, 다른 이들이 거리에 나온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쯤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일터에서 부당함을 느꼈을 때, 자신의 힘이 미약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생각해내는 일이다. 그러다보면 결국 정치권도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든지 ‘가만히 있던’ 사람들이 변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이것이 ‘대의 기구’로서의 국회의 역할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도록 하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그래서 촛불은 ‘현재’이면서 동시에 ‘미래’다.


이 글은 2016년 12월 7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