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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사람 (이상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6:43
조회
320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며칠 전 교사 두 분이 사무실에 왔다.


A 씨는 교장과 수석교사로부터 인권침해를 당했다며 도움을 요청하러 온 기간제 교사였고, 다른 한 분인 B 씨는 같은 학교에서 그분을 도와주고 있는 정규직 교사였다.


기간제 교사 A 씨는 학교생활의 작은 부분에서부터 차별을 당한 경험과 그로 인한 억울함을 담담하게 때로는 눈시울을 붉혀가며 얘기했다. 이 교사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다른 정규직 교사들은 무관심하거나 또는 오히려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문제를 일으킨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다른 기간제 교사들도 사정은 비슷했지만 ‘재계약’이라는 장벽 앞에서 움츠러드는 걸 지켜보며 뭐라 탓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사무실에 같이 온 정규직 교사 B 씨는 시종일관 기간제 교사 A 씨를 지지하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했다. 10년이 넘는 기간제 교사생활을 끝낼 결심 끝에 정식으로 학교 측에 문제를 제기하고,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을 하는 것도 정규직 교사 B 씨의 지지와 도움이 컸다고 한다.


작년 충남의 모 단체에서 제기된 여성 상근자에 대한 지속적인 성희롱과 성추행, 비인권적인 업무지시 등은 언론에까지 나오며 지역에서 화제가 되었다.


구체적인 증거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은 성희롱 사건의 특성상 자칫 문제가 장기화하거나 흐지부지될 수 있었지만, 이 사건은 뜻밖에 빨리 매듭 되었다. 가해자는 파면되었고 윗선의 조직 책임자도 물러났다. 조직에서는 사과와 함께 재발방지를 위한 조직 구성원 대상의 인권교육 시행을 약속했다.


사안이 이렇게 빠르게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은 피해자의 강단 있는 대처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와 함께 다른 원인 하나를 꼽자면 전, 현직 직원들의 증언이었다.


작은 규모의 단체였기 때문에 현직에 있는 경우 자칫 자신의 증언으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었고 이미 직장을 떠난 사람도 좁은 네트워크 상태인 지역 사정을 고려하면 쉽게 피해자에게 힘을 보태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전, 현직원들은 피해자의 도움 요청에 응답했고 가해자와 일하면서 자신들이 겪었던 성희롱과 피해자가 당한 성희롱, 비인권적인 업무방식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송곳’에서는 만화가 최규석 씨가 원작 만화에서 쓴 대사가 그대로 나온다.


“분명 하나쯤은 뚫고 나온다. 가장 앞에서 가장 날카롭다가 가장 먼저 부서져 버리고 마는 그런 송곳 같은 인간이…”


내 경험으로만 한정하면 위 두 사례처럼 조직 내 인권침해와 부패문제에 대해서 그냥 넘기지 않고 송곳처럼 뚫고 나오는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언제나 송곳 같은 이들의 바람처럼 잘못이 시정되고 조직문화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높은 비정규직 비율과, 정규직의 경우도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우리나라의 노동계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노사문화에서 노조나 외부 연대단체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직장 내 개인과 회사 간의 싸움은 개인 혼자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그래서 직장 내에서 남달리 인권감수성과 정의감이 높은 송곳 같은 사람은 “가장 앞에서 가장 날카롭다가 가장 먼저 부서져 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다.


“서는 데가 다르면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 이 말도 ‘송곳’에 나왔던 대사다.


한국에서 직장을 다니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는 위치와 거기서 보이는 것들은 크게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정규직이어도 노동조합 조합원이 보는 풍경과 비노조원이 보는 풍경은 많이 다르다.


20151102115751145124.jpg드라마 '송곳'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연대(連帶)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연대는 서는 곳은 비록 다를지라도 같은 곳, 같은 풍경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것은 비정규직의 차별에 대해 정규직일지라도 그 차별의 문제점에 대해 공감하고 개선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성희롱 문제에 대해 여성과 남성이라는 차이를 떠나 직장 내 인권침해 문제라는 인식을 공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각기 서는 데는 달라도 한 곳을 바라봐야 할 연대의 대상과 문제의식은 언제나 존재한다.


거의 모든 것이 기업중심인 대한민국의 구조상 노동조합 조직률이 당장 눈에 띄게 높아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라고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오히려 비정규직 사용 연한을 2년에서 4년으로 늘리는 법안을 만드는 현 정부에서 비정규직 문제가 개선될 여지도 없어 보인다.


그래도, 아니 그래서 실망하지 말고 연대하자고 말하고 싶다.


분명 송곳같이 뚫고 나오는 인간은 어디든 있다. 그런데 그 송곳이 하나가 아니라고 둘이라면, 송곳은 되지 못하지만 그 송곳을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송곳은 여전히 가장 앞에 있겠지만 적어도 부서져 버릴 가능성은 작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 한 사람은 그냥 한 사람이 아니라 차별에 놓인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일상적인 성희롱에 시달리는 여성 노동자에게는 그 자체가 커다란 조직이고 희망이지 않겠는가?


이 글은 2016년 1월 13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