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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맞고 누나는 틀렸다 (이상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6:39
조회
308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나만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가끔 지난 일이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다.


창피한 기억이면 나도 모르게 맘이 오그라들고 슬픈 장면이 떠오르면 주책없이 눈시울까지 붉어지기도 한다. 지난 기억이 생각날 때의 공통점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과의 연관성일 것이다.


11월 14일 광화문 집회 소식을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접했을 때도 그랬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불현듯 생각났다.


중학교 때였다. 9시 뉴스는 거의 매일 대학생들의 집회, 시위장면을 보여주며 당장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어조로 비판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집회, 시위는 물론이고 대도시에서 학교를 다녔던 내 나이 또래가 대부분 맡아봤던 최루탄 냄새 역시 한 번도 접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 당시 대학생들의 데모질에 대한 내 의식 수준은 뉴스 진행자가 전하는 논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식당을 했던 어머니가 뉴스에 나오는 시위장면을 제대로 봤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와 늦은 저녁을 먹으며 TV에 나오는 시위장면을 보다가 나는 어김없이 쌍시옷으로 시작되는 남쪽 해안가 특유의 욕을 시위대에게 내뱉었다. 그때 물끄러미 TV를 보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바로 그 말씀을 하셨다.


“힘들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간 학생들이 저리 마이(많이) 길바닥에 나와서 데모를 하는 거는 아마도 무슨 이유가 안 있겄나?”


솔직히 그 당시 대학생들이 외쳤던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가 이후에도 내 머리에 제대로 이해되어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어머니의 말씀 이후 가끔 궁금하기는 했다. ‘왜’ 저 많은 형님들과 누나들은 경찰에게 잡히면 신세 망칠 게 뻔 한 데모질을 저렇게 허구한 날 하는 것일까?


NISI20070608_0004569188_web.jpg1987년6월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의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18개 도시에서 가두시위 형태로 전개됐다. 서울 명동입구 도로 앞에서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경비중인 경찰병력이 도로를 완전 봉쇄하고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보도사진집 "그날 그거리")
사진 출처 - 뉴시스


민주노총과 전농을 비롯한 많은 시민 사회단체들이 12월 5일 2차 민중 총궐기 집회를 연다고 한다. 하지만 전농이 낸 집회신고에 대해서 경찰은 불법폭력 시위가 예상된다면서 집회금지통고서를 전달했다. 신고제인 집회에 경찰은 관심법이라도 있는 것인지 ‘예상’에 근거해 집회 금지를 통고한 것이다.


12월 5일 집회의 명칭은 <백남기 농민 쾌유기원·살인진압 규탄·공안탄압 중단·노동 개악 중단 민중 총궐기>라고 한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생명이 위태로운 한 농민의 쾌유를 빌고, 정권의 공안탄압과 노동 개악을 중단하라는 집회의 요구 내용은 사라지고 헌법이 보장한 ‘집회’ 그 자체의 불법성 여부만을 종편을 비롯한 보수 언론에서 단물이 빠질 때까지 씹어대고 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배달된 신문을 집어 든 사람들, 혹은 식당에서, 사우나에서 종편 뉴스를 보며 혀를 차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30년 전의 우리 어머니가 내게 했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이 추운 겨울날 저렇게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여 정부를 향해 외치는 분노의 내용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농민과 노동자와 청년들의 분노와 한숨의 장이 된 저 집회는 나와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두 번째 기억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한창인 2007년, 고향에서 누나를 만났을 때였다.


그때 누나는 내게 박근혜 씨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고향의 정치적인 분위기를 생각할 때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후보도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굳이 박근혜 씨를 지지하는 이유를 누나에게 물었다.


“저거 아부지가 대통령할 때 잘잘못을 옆에서 누구보다 자세히 봤고, 아부지가 그리 험하게 죽은 거를 겪었으니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정치를 제대로 안 하겄나 말이다.”


그때 나는 내 나름의 논리로 박근혜 씨가 후보가 되면 안 되는 이유를 누나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 대안으로 이명박 씨를 지지하라고 할 수도 없고 지리멸렬했던 당시 여권 후보는 씨도 먹히지 않을 분위기라서 내 말은 그다지 힘이 없었던 것 같다.


누나가 나름의 근거를 대며 지지했던 대통령 후보는 그로부터 5년 후에 그렇게 바라던 대통령이 되어서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누나의 그때 당시 지지 근거는 현재까지 상황을 볼 때 상당히 엇나가거나 틀린 바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오랜 세월 우리 사회가 어렵게 쌓아왔던 민주주의의 퇴적층은 국정화 교과서 추진과 같은 권위주의 통치방식으로 인해 급격하게 허물어지고 있다.


여러 가지 경제지표는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그에 대한 정부 차원의 실질적인 대응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로 인해 불안해하고 고통 받는 시민들은 오히려 공약으로 내밀었던 각종 복지정책 대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심지어 시위 군중을 테러집단에 비유하는 대통령의 언사는 자기 아버지의 집권 말기 상황을 떠오르게까지 한다.


어머니에 관한 흐뭇하고 즐거운 기억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볼 때 30여 년 전 어느 늦은 저녁 밥상에서 TV 뉴스 속 데모 학생을 보고 하신 서늘한 말씀은 계속 생각날 것 같다.


정말 바라지 않았던 대통령이었음에도 현실화된 이상 누나가 2007년에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던 이유가 현실화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집권 3년을 다 채워 가는 현재 나의 바람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어머니는 맞고 누나는 틀렸다.


이 글은 2015년 12월 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