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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올바른” 역사란 없다 (강국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6:38
조회
313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셰리프라는 미국 사회심리학자가 꽤 흥미로운 실험을 1930년대에 한 적이 있다. 실험 참가자들을 몇 개 집단으로 나누어 벽 중앙에서 불빛 한 점을 볼 수 있는 어두운 방에 들어가게 했다. 이들은 불빛이 얼마나 멀리 움직이는지 보고해야 했다. 방 안이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달리 거리를 측정할 방법은 없었다. 실험 대상자들은 불빛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움직였는지 의견일치를 봤다. 하지만 집단마다 결론이 다 달랐다. 사실 그 불빛은 실험 내내 제자리에 있었다(Babbie, 2007: 61).


근대 사회과학을 지배한 것은 개인의 인지적 사고에서 독립된 객관적 실체에 대한 믿음이었다. 셰리프의 실험에 참여한 각 집단은 특정한 망상에 합의했다. 그렇다고 실험 대상자들이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은 ‘창조된 실체’, 즉 사회적으로 구성된 실체였을 뿐이다. 우리는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객관성’이란 관념은 과연 얼마나 객관적인가?


여전히 많은 이들이 ‘과학은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객관적’인 것이 올바르다고 간주한다. 주관적인 역사는 있는 사실을 무시하는, 역사가 아닌 ‘소설’ 혹은 역사왜곡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저마다 생각하는 ‘올바른’ 역사는 다를지 모르지만 어쨌든 ‘올바른’ 역사는 있다는 게 ‘상식’이다. 중요한 건 5·16을 쿠데타로 보는게 올바른 역사인가, 아니면 불가피한 결단으로 보는게 올바른 역사인가 하는 차이 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할까.


박근혜를 비롯한 새누리당 정권이 국정 교과서를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명명하는 밑바닥에는 자신들이 객관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으며, 절대다수 국민들은 틀린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이명박근혜 정권 교육부장관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치게 했다.). 이들은 끊임없이 '편향된 역사교과서'를 문제삼는다. 물론 그 편향이란 대부분 해석을 둘러싼 것이다.


20151118web01.jpg사진 출처 - 서울신문


박근혜가 말하는 객관성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객관성이 외치는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는 얼피 견고해 보이는 차벽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단 한 사람 앞에서 무너진다. 결국 객관성이 객관적이려면 ‘사람의 눈’이 아닌 ‘사물의 눈’을 빌어야 한다(조용환, 1999: 26). 박근혜로서는 자기 관점이 객관적이란 걸 입증해 (온 우주가 나서서 국정교과서를 도와주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 거기서부터 유체이탈은 시작된다.


바비(2007: 62)라는 학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과학이 객관적 세계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실증주의자들의 믿음은 궁극적으로는 신앙적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심지어 객관적인 실체처럼 보이는 계급조차도 반드시 객관적이진 않다. 아벨만이란 학자가 한국 여성의 계급의식을 다룬 연구를 보면 이들은 자신이 현재 속한 객관적인 계급지위보다는 과거 자신이 속했던 친정의 계급 기반과 미래에 자기 자녀들이 갖기를 바라는 계급 지위에 더 영향을 받는다.


서울 빈민지역에서 전세로 얻은 세탁소를 운영하는 50대 후반 강 씨 부인은 객관적으로는 하류층일지 모르지만 본인은 자신을 중산층으로 인식한다. 자신이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고 친정 형제들이 중산층인데다 자녀들도 웬만큼 살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이 “때를 잘못 만났고” “남편을 잘못 만나서 평생 고생”을 하지만 강 씨 부인에게 중요한 건 객관적인 계급지위가 아니라 친정의 계급기반, 그리고 자녀들이 ‘객관적인’ 중산층이 됐다는 주관적인 계급의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올바르다는 것은 과연 누구에게 올바른 것인가? 비록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침몰하는 것 같은 암담함을 느낀다 하더라도 저들의 “올바른” 역사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가 또 다른 “올바른” 역사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더 나아가 “올바른” 역사라는게 과연 있기는 한걸까? 차라리 올바르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헤게모니를 놓고 투쟁하는 담론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객관성을 중시하는, 그러므로 올바른 역사를 지향하는 전통적인 역사서술은 보통 극좌에서 극우까지 1에서 10까지 단선으로 가정한 뒤 5에 위치한, 이른바 중립적인 균형점을 유지해야 한다는 관념에 입각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다. 올바르게 쓴 역사책이 아니라 공정한 역사책이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지 않을까?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역사에서 해석을 독점하는 단 한 권만 존재해야 할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


영국 역사학자 젠킨스(1999)가 강조하는 공정한 역사는 이런 식이다. 각자 입장 위에 1에서 10에 이르는 추를 맞춘다. 각자 정치적 성향이나 세계관에 따라 1에 위치할 수도 있고 10에 위치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각자 입장 위에서 1에서 10을 ‘공정’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무엇이 역사인가’ 혹은 ‘어떤 역사적 사실이 있었는가’라고 묻지 않고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고 묻는 이 이다.


객관적 실체 자체를 회의하는 관점은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너도 옳고 나도 옳은’ 양비양시론에 빠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개인 경험에 비춰본다면 ‘객관적인 역사’에서 ‘공정한 역사’로 세계관을 바꿨을 때 조금은 더 세계가 명쾌하게 보였다. 나와 다른 해석을 인정하고, 헤게모니를 가진 역사담론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인식론을 통해 세계를 바꿔 나갈 수 있는 희망의 근거를 발견했다.


“지식이란 항상 권력과 연관되기 때문에 사회구성 안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쥔 사람들은 자기 이해에 부합되는 ‘지식’을 최대한 퍼뜨리고 정당화시키려 한다. 이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권력을 분석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이론적 상대주의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다. 여러분은 상대주의적 관점을 통해 절망에 빠지기보다는,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재평가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곧 해방의 의미다. 반성을 통해서 여러분 또한 역사를 만들 수 있다(젠킨스, 1999: 87).”


<참고문헌>
조용환(1999). 『질적 연구: 방법과 사례』. 교육과학사.
케이스 젠킨스.(1999).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최용찬 옮김. 혜안.
얼 바비(2007). 『사회조사방법론(제11판)』. 고성호 외 옮김, 센게이지러닝코리아.


이 글은 2015년 11월 1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