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어느 난민 활동가를 기리며... (이동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6:31
조회
301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그를 처음 만난 건 2007년 10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시 민변을 포함한 한국의 시민단체들은 버마(미얀마) 시위대에 대한 버마군부의 무차별 총격 및 유혈 강제진압에 대한 국제연대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고, 그 곳에서 버마(미얀마)의 참혹한 실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버마(미얀마) 활동가를 만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내툰나잉(Nay Tun Naing)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NLD(아웅산 수찌 여사가 이끌던 미얀마 야당)지부 소속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버마(미얀마) 인권상황에 무지한 나를 포함한 한국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진지하고 열정적 자세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고, 한국 시민단체들과 버마(미얀마) 단체들 간 연대체 결성 및 공동대응에 함께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와의 첫 번째 만남이자 연대활동이었습니다.


그는 난민입니다. 1990년 미얀마 총선 때 아웅산 수찌 여사의 NLD 활동을 했던 그는 1994년 미얀마에서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한국에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하였고, 이후 미등록(불법?)체류자격으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조국 미얀마의 민주화 투쟁을 위해 2001년 한국 정부에 난민신청을 하였고, 2003년에 어렵게 난민지위를 획득하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난민인정에 인색하기 그지없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버마(미얀마)인이 최초로 정치적 박해를 이유로 하여 난민인정이 된 것입니다. 이 일로 당시 민변 회원들과 인연을 맺었던 그는 나중에서야 “그때가 민변과의 첫 번째 인연이었고, 너무 고마웠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고국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활동에 소위 ‘올인’을 하였습니다.


버마(미얀마) 민중들의 절박한 투쟁에도 버마(미얀마)는 여전히 군부 독재 지배하에 있습니다. 버마(미얀마)의 민주화를 원했던 한국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버마 상황에 의해 일회일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내툰나잉을 포함한 버마(미얀마)출신 활동가들은 매주 한국 주재 버마(미얀마)대사관 앞에서는 시위를 개최하는 등 고국의 민주화를 위한 끊임없는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그들과 때때로 함께 하였으나 여전히 자신들의 상황에 묻혀 다른 나라의 인권문제는 뒤로 밀렸습니다. 하지만 버마(미얀마)에서 나쁜 소식이 있거나, 한국에서 미얀마 관련 행사가 있거나 캠페인을 할 때면, 나를 포함한 국제연대 활동가는 항상 내툰나잉을 찾았습니다. 그는 매번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성심성의껏 응답을 해 주었고, 한번쯤 귀찮은 내색을 보일만도 했지만 그는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얼굴 한 번 찡그리는 일을 본 적이 없었고, 그 것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070124web10.jpg2007년 1월 2일 진행된 1차 Free Burma Campaign에 함께했던
내툰나잉(Nay Tun Naing)씨의 모습


2013년 민변 내에 아시아인권을 위한 내부 팀이 만들어지고 처음으로 연락한 사람이 내툰나잉이었습니다. “법률가 단체인 민변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라는 내 질문에 그는 ‘2008년 미얀마 헌법’에 대한 활동을 제안하였습니다. ‘2008년 미얀마 헌법’은 군부에게 지방의회와 국회의원 1/4명의 지명권을 보장하고 있고, 아웅산 수찌 여사의 대통령 출마를 불허하는 조항을 가진, 한마디로 한국의 유신헌법처럼 군부의 권력을 보장하는 반인권적인 헌법이었습니다.


이후 ‘2008년 미얀마 헌법’ 개정을 위해 민변은 2013년 사전답사를 다녀왔고, 2014년 2월 한국에서 미얀마 법률가 2인을 초청하여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였으며, 2014년 7월 아시아인권팀 10명은 현지방문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활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내툰나잉의 헌신적인 노력과 도움이었습니다. 현지 방문 시, 누구와 만나야하는지, 어디에서 머무를지 다 조직해주었고, 미얀마 법률가 초청 시에도 내툰나잉은 적극적으로 나서 주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2008년 미얀마 헌법’은 개정되지 않았습니다.


민변, 버마(미얀마)와 관련된 여러 활동을 함께 하며 내툰나잉과 개인적으로 가까워졌고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얀마 2번째 방문 이후 어느 자리에서 내툰나잉은 “올해(2015년)에는 미얀마에 다시 돌아가려 해. 돌아가서 NLD 선거에 도움을 주고 싶어”라고 말했습니다. 미얀마는 여전히 군부독재 정권이지만 최근 해외의 민주화투쟁 활동가에게 준법서약서를 작성하면 입국이 허락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내툰나잉은 준법서약서 작성을 거부하고 여전히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내심 놀랐지만, 만약 돌아간다면 21년만의 귀국이니 무척이나 뜻 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연인도 버마(미얀마)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고국을 그리워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그가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그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심장질환이라고 합니다. 멍하니 아무생각이 들지 않다가 장례식장에서 그의 영정사진을 보고서야 실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척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그토록 그리던 고국에 다시 돌아가려 했던 그였기에,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동지, 친구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 그였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장에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툰나잉에게 항상 부탁만 하였고 그는 한 번도 내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구나’, ‘항상 내가 필요할 때만 연락을 했구나’ 그에게 많이 미안하고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오늘도 우리의 이야기를 말하며 연대를 외칩니다. 1990년도와 2000년도 초, 무서우리만큼 무관심한 한국사회 속에서, 그는 자신의 나라의 민주주의를 외치며 한국의 시민사회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다행히 그 손을 붙잡았지만 붙잡은 내 손이 이기적일 때가 더 많았기에 부끄럽습니다. 어쩌면 일상의 무게에 눌려 다시 입으로만 국제연대를 외칠지도 모르지만 그가 보인 열정과 진심은 한동안 큰 울림으로 남을 것입니다.


열정과 진지, 미소와 따뜻함을 지녔던 내툰나잉을 기억하며, 먼 곳에서나마 고국과 고향, 가족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 글은 2015년 9월 16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