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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서는 안 될 것들에 대한 여행 (이동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6:19
조회
312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최근 3박 5일 일정으로 베트남 호치민, 껀터, 다낭, 호이안 도시를 다녀왔다. 민변 아시아인권팀에서는 올해 7월 말부터 6박 7일 동안 베트남 평화기행을 준비 중인데, 이를 위한 사전답사로 다녀오게 된 것이다. 5월초 한국 같으면 계절의 여왕이겠지만, 베트남은 예상대로 덥고 습했다. 거기에 계시는 현지 분들은 우기가 시작되어서 날씨가 서늘한 편이라고 하는데, 맙소사

개인적으로 베트남은 월남전, 신흥 관광지, 동남아경제 성장국 등의 이미지를 가진 국가였는데, 민변 아시아인권팀은 작년 말부터 베트남 전쟁 시 있었던 수많은 전쟁범죄, 그중에서도 한국 군인에 의한 전쟁범죄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고, 여러 법률적 쟁점을 연구하다 그 연장선상에서 올해 베트남에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한국 군인에 의한 베트남양민학살 사건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소수의 언론인과 용기 있는 활동가들에 의해 한국 사회에 그 실체가 드러났고, 당시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까지 크게 반향과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악(?)한 베트콩으로부터 선(?)한 베트남정부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이미지는 그 추악한 민낯을 드러냈다.

3박 5일이라는 짧은 일정동안 가야할 곳도 많고 만나야할 사람들도 많았다. 가장 먼저 방문하고 만난 곳은 전쟁증적박물관(War Remnant Museum)이었다. 그곳에는 베트남 전쟁관련 사진과 자료, 실재 전쟁 시 사용한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진 네이팜탄 폭격으로 울부짖는 소녀사진, 베트콩 장교를 노상에서 권총으로 사살하는 사진, 미군의 미라이 학살보도 사진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한국 참전군인에 대한 자료도 볼 수 있었다. 그 자료속의 한국군인은 정의의 수호자가 아닌 미국의 용병으로 가혹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의 모습이었다. 어렸을 때 자주 들었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의 무용담이 베트남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어떠했을까 섬뜩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을 비교해 놓은 표를 보고선 ‘왜 한국인은 베트남 전을 통해 경제성장을 했다는 것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여기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한국에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는 박물관장인 후인 응 옥 번 님을 만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분은 베트남 전쟁만을 이야기 하지는 않았다. 베트남 독립을 위한 전쟁은 19세기부터 시작되었고 당시 프랑스와의 전쟁, 그리고 우리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미국과 연합국과의 전쟁,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전쟁, 이 오랜 기간 베트남인들이 어떻게 저항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러면서 평화를 위한 기억, 평화를 위한 노력이 현재에도 필요하다고 이야기 하며, 최근 한국 방문 시에 경험했던 베트남 고엽제피해군인들의 행사방해와 집회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전쟁증적박물관에 한국인에 의한 전시를 꽤나 바랬는데, 당일 박물관에는 일본인 사진작가에 의한 특별전시가 이뤄지고 있었다. 이후 방문 시에는 박물관 측에서 한국 참가자들과 베트남 전쟁의 여러 피해자들과의 미팅을 주선해 준다는 제안을 해 주었다.

다음으로 껀터에 있는 인민위원회를 방문하여 베트남 여성들 중 한국인과 결혼하였다가 이혼 또는 여러 사유로 인하여 다시 베트남으로 귀환하신 분들의 현실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뤘으면 하고, 다음 일정으로 미라이(학살) 박물관에 방문하였다. 미라이 학살은 이미 언론을 통하여 많이 알려진 사건이지만 간략히 이야기하면,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미라이(베트남어 손 미)지역에서 미군에 의해 민간인 347명에서 504명까지의 대량학살이 발생하였고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었으며 사건에 가담한 미군 26명 중 1인만이 유죄판결을 받았던 사건이다. 개인적으로 너무 놀랐던 것은 박물관 옆에 학살 시점의 논두렁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는데 그 발자국들에게서 당시의 긴박함과 공포, 다급함, 애처로움이 그대로 느껴졌다. 살기 위해 도망치는 발자국, 그 옆의 자전거 바퀴자국, 그리고 그 뒤를 쫓고 학살 했을 군화 발자국까지... 순간 멈춰서 넋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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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이(학살)박물관 옆에 보존되어 있는 마을 논두렁길
사진 출처 - 필자


마지막 일정으로 한국의 진보언론과 자료를 통해 공개된 한국군 증오비(위령비)를 찾고 피해자를 만나는 것이었다. 사전 한국에서의 자료는 한국어 또는 영어로 적혀 있고, 베트남 자료가 있다 하더라도 이해를 할 수 없어 증오비로 알려진 사진, 자료, 원문 자료를 잔뜩 들고 찾아 나섰지만 생각보다는 그 위치를 찾기 너무 어려웠다. 마치 서울 서초구 서초동까지 나와 있는 주소와 관련 사진만으로 서초동 아주 작은 마을에 깊숙이 위치한 묘비를 하나 찾아가는 식이었다. 수십 번의 질문과 시행착오 끝에 정말 운이 좋게 꾸이보마을의 위령비를 찾았고, 그 위령비 인근에 거주하시는 할아버님을 통해 퐁니마을의 위령비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위령비에 적혀진 피해자들의 이름, 주소, 나이를 보았는데, 아직 이름도 짓지 못한 1살짜리 아이가 올려진 모습을 보고 다시 넋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에 쫓기듯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방문 전에 전쟁범죄라는 활자를 통해 건조하게 베트남을 접근하였고, 방문했을 때 여러 일정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여유가 없었지만, 현지에서 느꼈던 충격과 참혹함은 기존의 내 기억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한국 전쟁이라는 트라우마를 사회구성원 전체가 나눠지고 있는 한국에서 성장한 나이지만, 사실 전쟁을 자기방식대로 기억하고 파악하고 있는 내면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피해자라는 입장에 서 있다가 갑자가 가해자임이 밝혀지는 순간 그 사실을 부인하는 모습을 우리는 종종 본다. 비단 과거사를 부정하는 일본 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법률가단체의 관점에서 베트남 전쟁을 접근하고 있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7월 방문도 진행하겠지만, 답사를 통해 여러 문제의식과 복잡한 심경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답사기간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던 생각은 ‘잊어서는 안 되겠다. 잊지 않기 위한 방문이 되어야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