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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당신들의 나라, 당신들이 지켜라! (홍성준)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6:09
조회
212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처장


 

“13월의 보너스”, 세금환급을 기대했던 노동자들이 “세금 폭탄”을 맞았다. 노동자들은 열 받고, 시중 여론은 비등하였다. 정부의 설명은 소득공제가 세액공제로 전환되면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일이고, 당장은 어렵지만 ‘소득재분배’라는 정책목표는 달성할 것이라며, 참으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당장 힘든 노동자에게는 분할 납부를 하게 해줄 것이고, 소급 입법을 통해 공제 항목들을 다시 원래대로 복원한다고도 한다. 급기야는 “대독 총리”라는 정홍원이 국무총리에서 물러나고, 야당과 협상을 잘한다는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총리에 내정하였다.

그런데, 정초의 “담배세 인상”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는 똑똑히 보았다. ‘세금이란 유사 이래로, 또는 본질적으로 계급 차별적’인 것이라는 것 말이다. 아무리 여론이 비등해도 대기업에 쌓여있는 천문학적인 유보금에 대해서는 “감세 정책”이라는 정부 입장은 완고하다. 그러면서, 세수부족분을 오로지 노동자와 서민에게만 전가해서 수조 원의 세금을 더 걷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실질소득은 나날이 줄고 있지만 가파른 세 부담으로 등골이 휠대로 휜 노동자들에게 말이다.

한편, 이번에 세금폭탄을 맞은 노동자들은 주로 5인 이상 가구이거나 노후연금 가입자들인데, 이는 그동안 정부 시책과는 정면으로 배치가 되는 것이다. 이를 다시 조령모개(朝令暮改)식의 소급 입법을 통해 원래대로 본원 한다는데, 정부가 노동자, 서민에 대한 증세에 급급한 나머지 정책혼선, 신뢰붕괴를 자초한 것이다.

다음은 국민들의 노후생활을 위한다는 “국민연금과 각종 연기금, 공적기금”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난해 우리사회는 하반기 케이블 방송 씨앤앰(C&M, 이하 씨앤엠)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떠들썩했다. 드러난 문제는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의 문제이지만, 이면에는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공적 기금과 감독하는 금융기관의 수익성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케이블 방송 씨앤앰의 큰 문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2008년 호주의 사모펀드 맥쿼리와 정체불명의 MBK파트너스가 씨앤앰을 인수하는 것을 방송통신위원회가 승인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방송법과 전기통신사업법의 위반사항이 분명하다.

씨앤앰의 다른 문제는 MBK파트너스가 인수방식인 차입매수(LBO : Leveraged Buy-Out)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장차 인수할 씨앤엠의 주식을 담보로 2조 1,500억 원을 신한은행 등에서 대출을 받아서 인수했는데, 채무만기 때까지 씨앤엠의 수익금 상당액은 이 채무상환으로 충당될 것이므로 재정건전성 악화는 피할 길이 없는 것이다. 또한, MBK파트너스는 씨앤앰 뿐 아니라 한미캐피탈, HK저축은행 등 구내 금융기관들과 중국, 일본, 대만의 기업들을 공격적으로 인수를 하고 있는데, 대개 신한은행 등 국내 유수의 금융기관들이거나 국민연금 같은 공적 연기금의 대출과 투자를 받아서 차입매수를 한 것이다.

국민연금 등의 수익성이 높아야 국민들의 노후가 행복한 것이고, 은행의 수익성이 좋아야 예금자 등 금융소비자들도 보다 많은 이자 수익을 가져가는 것이다. 자, 국민연금 등의 수익성을 보다 더 높이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보다 수익성 높은 사업에 투자해야 하는 것인데, 그 답은 고수익을 노리는 투기자본가(대체로 사모펀드의 운영자)에게 투자하고, 그 투기자본가들이 먹튀에 성공해야 한다. 이러한 구조를 뒤집어 보면, 어떤 노동자들의 노후를 위해 다른 어떤(보다 약한) 노동자들은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이러한 현상은 씨앤앰 뿐 아니라 사모펀드가 대주주인 기업체, 은행 등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다른 나라의 연기금들도 마찬가지이다. 몇 년 전, 서울 지하철 9호선에서 “세금 도둑질”을 한다는 투기자본 맥쿼리와 투쟁을 할 때 일이다. 맥쿼리는 주로 신한은행과 군인공제회의 투자를 받아 사회간접시설을 운영하며 수익을 낸다. 맥쿼리의 상무가 해명을 하겠다며 우리센터를 찾아와 “자신들이 투기자본이 아닌 이유”에 대해 말했다. 다른 말은 억지이거나 궤변이라서 다 반박을 했지만, 마지막 주장에서는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투기자본감시센터의 논리대로라면, 대한민국 정부가 가장 큰 투기자본인데, 왜 작은 우리만 비판을 하는가!”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정부는 직접 운영하는 공적 기금과 관리하는 금융기관의 자금을 동원해서 투기자본-사모펀드에게 대출 또는 투자를 하고, 투기자본의 불법적 고수익을 정부가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정부가 곧 투기자본인 것이고, 정부는 국내 최대의 투기자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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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자 전원 복직을 요구하며 서울 중구 파이낸스센터 인근 전광판 위에서
50일 동안 고공 농성을 해 온 케이블방송 씨앤앰(C&M)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지난해 말부터 정부는 공무원연금을 개혁하겠다고 나섰고, 공무원노조와 노동운동계는 저지투쟁에 나섰다. 공무원노조의 주장이 대부분 공감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억울하다는 그들의 주장을 이해한다. 일부에서는 국민연금으로는 “노후 보장”이 되지 않으므로, 모든 연기금을 통합해서 전체적인 국민연금의 “수급률”을 높여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국민연금이 실상은 “개인부담금”으로 적립된 현실을 볼 때, 그 수급률을 높이는 것이 곧 투기자본의 먹튀에 전국민이 동참하는 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지적하지 않는다. 옛날의 어느 중이 했다는 “갈대 구멍으로 세상을 본다(葦管窺天)”는 말이 생각난다.

문제는 “복지”이다. 이 모든 것이 “증세 없는 복지”를 공약한 대통령의 사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은 단견이다. 복지라는 것은 본래 어떤 것인지, 특히 세금을 내는 노동자 입장에서 먼저 규명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끼리 세금을 더 내서 복지 수요를 충당하는 현실을 보면서, 먼저 드는 의문은 복지는 ‘있지도 않는 국민 전체’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회적 빈곤이 현 체제를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에 대비해 노동자들 중에 일부 극빈층들에게 약간의 위로금, 공적 서비스를 주어서 불만을 무마하려는 것일까? 즉, 국방비 같은 일종의 ‘체제 유지비’같은 것인가?

물론, 지금의 사회적 불만은 정부가 “근로소득세”를 내는 노동자들 여러 층위로 나누어 놓고, 보다 소득이 많은 노동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서, 그보다 소득이 낮은 노동자에게 약간의 보조금을 주는 것에 있다. 이를 두고 ‘소득재분배’라는 것이다. 일부 “운동권” ‘식자’들도 이런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것은 “귀족노동자”의 욕심으로 일자리를 나누지 못해서 비정규직 양산과 청년 실업이 생겼다는 정부와 자본의 궤변이 확장된 것이라고 본다. 복지의 비용을 노동자들이, 노동자들 각각이, 또는 그 중 상위 소득자들이 부담하는 것, 자체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아는 한 현대 국가들이 복지정책을 시행한 이유는 1917년 러시아 혁명과 같은 ‘노동자 혁명에 대한 예방’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후, 불황 속에서 유럽의 노동자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중투쟁을 했다. 그때, 러시아처럼 국가권력을 내줄 수 없었던 유럽의 자본가들, 국가의 지배자들은 그 반대급부로 “복지”를 약속한 것이다. 그리고 그 비용의 상당부분도 자본과 국가의 부담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근대적인 국가보험이라는 독일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도 당시 성장하는 독일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예방차원에서 노동자들에게 시행한 것이다. 즉, 복지란 노동자들이 강력한 투쟁을 통해 ‘자본과 국가로부터 쟁취한 권리’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진짜 복지’이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橘化爲枳)”라는 말이 있다. 지금, 한국에서는 전혀 다른 맥락의 “복지”가 논쟁 중이다. 주로 노동자 개인에게 세금을 지금보다 조금 더 걷어서, 한국의 노령화 사회와 저출산 문제에 대비하자는 식이다. 즉, 체제유지를 위한 노동자 재생산이 복지가 된 것이다. 마치, 지난 김대중 정권의 “생산적 복지”가 재현된 듯하다.

복지비용을 일종의 ‘체제 유지비’라고 하는 것은 복지의 유래를 생각해볼 때, 합당한 말이다. 그리고 그 체제 유지비는 당연히 현 체제에서 큰 수혜를 입는 자본이 전부 또는 대부분을 부담해야 옳다. “국민 모두가 공평하게 의무”를 져야 한다는 헛소리는 말아야 한다. “우연히 이 나라에 태어나서 그냥 산 것 뿐이고, 지금까지도 충분히 불공평한 이 나라가 뭘 더 나에게 요구하는가!”, “당신들의 나라, 이제는 당신들이 부담을 해서 지켜라!” 이렇게 주장하며 노동자는 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