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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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바람이 분다(최유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10-14 14:30
조회
714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암막 커튼을 쳐 어둑어둑한 방안은 바깥이 낮인지 밤인지 알 길이 없다. 아침이 왔음을 아는 방법은 하나 있다. 사는 곳이 빌라인지라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는 사람들이 문을 닫을 때 소리가 들린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아! 아침이군.’ 나는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잠의 세계로 입장한다.


 딩동 초인종이 한 번 울렸다. 3초 후 똑똑. 문을 두드린다. “택배 왔습니다. 최유라 씨 집에 계세요?”
의심할 여지 없이 내 이름을 불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택배 올 게 없는데.’ 일단은 문을 열었다. 눈이 부셔 눈을 반쯤 뜬 채로 택배를 한 손으로 받았다.


 택배에 보낸 사람은 없고 받는 사람만 적혀있다. ‘이게 뭐지?’ 생각하면서 천천히, 택배를 봉하고 있는 박스테이프를 뜯어냈다. 그 안에는 이런 글자가 들어있었다. “명절”


 나에게는 ‘명절前증후군’이 있다. 명절이 다가올 때쯤 우울증이 방문한다. 내가 겪고 있는 이 증후군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 묻어둔 시절들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오르면서 발생하는 우울증이다. 명절에 집에 내려가지 않기 시작하면서 괜찮아지는 것 같았는데 최근 다시 겪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고구마를 팔기 시작하는 곳이 생겼다. 고구마를 먹을 때면 어떤 날은 목이 막혀 울게 된다. 물을 마시면 될 것을. 어리석게도 그런 생각도 할 수 없는 때가 있다. 가끔 고구마를 보면 할머니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명절날 아랫목에 모여 고구마를 먹는다. 한 손에 고구마를 쥐고 한 손에 할머니가 찢어준 경상도식 김치를 고구마에  돌돌 말아 우걱우걱 씹어먹는다. 달달한 고구마에 짭조름한 김치의 조합은 한 번 맛본 이는 있어도 맛보고 끊은 이는 없다고 해야 할 정도의 환상 궁합이다. 그에 더해 “마이 무구라.”는 할머니의 말은 그 맛에 첨가된 좋은 MSG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할머니가 자기주장을 하던 기억이 전혀 없다. 돌이켜보면 할아버지의 목소리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다. 할아버지는 술에 취해 집이 떠나가라, 쩌렁쩌렁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를 했던 강렬하고 선명한 기억은 있지만, 그 옆에 있던 할머니는 그 모든 순간에 그저 조용히 침묵 아닌 침묵을 삼키던 기억만이 있다.


 돌이켜보면 할머니는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목소리로 살았을까? 자신의 목소리 없이 살아가는 것을 가족이라는 이유로 당연하게 여겼던 것은 아닐지. 그러고 보면 나 자신도 할머니의 지난 삶을 궁금해한 적이 크게 없었던 것 같다. 내게 할머니는 가정폭력의 피해자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할머니에 대한 슬픔 그리고 오랜 시간 묵인해온 가족에 대한 분노. 이 감정들이 한 데 뒤섞여 내 삶에 오랫동안 자리 잡아 왔다. 나는 그 감정에 익숙해진 나머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만, 진짜 사람을 보지 못한 실수를 저질렀다.


 최근 아빠가 할머니를 기억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나에게도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아빠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았다. 사실 우리 모두 아프다는 것을. 나에게도 불어온 이 바람이 상처 입은 우리 모두에게 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젠가 명절에 도란도란 서로 얹어준 김치와 고구마를 먹으며 할머니를 추억하는 날이 오기를. 형식적인 제사를 내려놓고 사람을 기억하는 제의 의미로의 식탁이 존재하는 그런 명절이 오기를. 단지 혈연이라는 이유로 존재하는 가족이 아니라 서로에게 진심이 되어 이야기 나누는 날이 오기를.
그런 날을 꿈꿔보며 다시 택배 상자를 봉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