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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그들은 잘못이 없다(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0-09-22 16:07
조회
613

= 사람은 혐오받는 만큼 혐오하며 존중받는 만큼 존중한다.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 친밀한 관계(부모)와 실제적 권력 관계에서의(관리자, 교사) 혐오표현에 대하여 더욱 민감해져야 합니다. 그들의 혐오표현을 학대 및 폭력으로 규정하고 사회적으로 선언해야 합니다.


 요즘 청소년의 혐오표현이 너무나도 심각한 문제라고 합니다.
 그 표현이 언어 사용을 의미한다면 과연 청소년들은 그 언어들을 어디서 습득했을까요?
청소년들은 그 언어를 무슨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일까요? 혐오와 차별을 연구하는 많은 전문가들은 '혐오표현의 문제는 청소년의 인성 문제가 아니다'라는 입장이 대부분입니다. 근래에 부쩍 청소년의 혐오표현이 늘어나는 것은 그것을 막거나 걸러줄 방어막이 아예 없거나 필터가 아주 미비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라고 보고 있습니다. 양과 질에서 혐오표현이 심각한 까닭은 이미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많이 부리고 사용하고 대화하기 때문입니다. 혐오표현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듣고 수용하는 대상이 있어 어떤 언어적인 목적을 가지고 소통하기 때문이며 그 소통이 구체적인 사회적 행동인 차별과 폭력으로 행사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청소년에 의한 혐오표현과 청소년에 대한 혐오표현은 서로 상관관계가 깊으며 서로 상승효과가 많습니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혐오표현의 피해자가 되거나 혐오표현에 노출되면 자연스럽게 혐오표현의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혐오표현의 현상은 그 동안 쌓여온 우리 사회의 청소년에 대한 혐오가 당사자인 그들에게 내재화 동일화 되어 바이러스처럼 N차 감염을 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다르지만 항상 혐오표현은 그 효과의 결과에 주목합니다. 혐오를 극대화하고 그 혐오의 감정을 서로 나눌 수 있으면 그만입니다. 혐오표현은 그래서 그 결과값에 따라 대상과 표현을 선택하고 그 선택은 어른과 사회가 고르는 약자의 순서를 주로 따릅니다.

 심리적, 정치적, 경제적 약자로 만들고 그런 대상이 되는 것이 사회적 저주이자 개인적 불행이자, 느끼고 싶지 않은 슬픔이 될 때 그 표현들은 혐오표현이 됩니다. (그런 정의에 따라 일각의 주장대로 ‘한남’이란 표현은 아직 혐오표현으로써의 언어적 힘은 가지지 못했습니다, 혐오가 특정한 주제와 목적을 두고 주제와 대상을 고르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자기가 소속된 그룹이나 소속되고 싶은 그룹에서 집단적으로 약하거나 배제시키고 싶은 ‘약자’를 고를 뿐입니다.


 청소년의 혐오표현이 심각한 것은, 언어 사회학적으로 또래문화의 소통의 도구로 혐오표현이 많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많이 사용된다는 뜻은 혐오표현을 했을 때 그것을 수용하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고 이것은 혐오를 재생산하고 증폭시키다 못해 결국 다시 자기혐오에 빠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만듭니다. 예) 초등학생들을 비하하는 인터넷 용어들


 청소년들은 혐오표현을 하나의 어휘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각자의 감정을 배설하거나 현상을 풍자하는 욕이나 육두문자와는 다르게 사용합니다. 서로의 문화와 관점을 가장 강렬하게 전달하는 문학적 시적 표현으로 인식합니다. 아니 이미 우리 사회가 그것을 관용 표현으로 사용하고 있지요. 예) 일베 청소년 병신들, 지랄하는 청소년들.


 그래서 청소년의 혐오표현의 증가는 이미 어른들과 (특히 정치인) 언론 사회가 엄청나게 혐오표현을 일삼아 온 것의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혐오표현을 제거하는 것에 있어서 청소년들에게 익명성 자체는 그렇게 큰 영향이 없습니다. 인터넷 실명제를 시행한다고 한들, 그들은 또다시 다른 캐릭터 형성이나 익명성 공간으로 이동할 것입니다.


 오히려 청소년을 향한 과도한 실명제와 같은 규제는 그들의 언어표현과 존재를 더욱 은폐시키고 사회화하기 어렵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교복에 이름표를 다는 것과 같은 이치- 그것이 왜 인권문제가 되었겠는가?) 익명성을 보장하되 그 표현과 행위가 문제가 되었을 때만 실명 확인이 가능한 시스템이 더 필요하고 그렇게 처벌되는 것을 널리 홍보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익명보장에 책임과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고 그 책임과 의무는 혐오표현이 의사소통으로 이어지거나 대상을 공격하거나 구체적인 차별이나 폭력으로 이어졌을 때 그것에 대한 처벌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혐오표현을 혼자 있을 때 개인 공간에서, 따로 듣거나 보는 사람이 없을 때 사용했다면 그것은 스트레스를 푸는 욕의 순기능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런 혐오표현은 IMF 사태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여 2000년 이후 초단핵화 가족이 늘면서 증가했습니다. 특히 혐오표현의 심각성과 강도와 수용성은 생활공간에서, 오프라인 공간에서 일어나는 어른들의 직접적인 표현이 더 큰 문제입니다. 그들의 언어 사용은 청소년의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공격성을 강화합니다. 이런 혐오를 당한 청소년들은 이러한 심리적 보상과 방어기제로 또 다른 공격 대상과 혐오 대상을 찾습니다.


 ex) 대견하다. 어른들의 위계적, 도덕적, 사적, 강압적, 평가적 혐오표현 (자신보다 위거나 강자들에게는 이 표현을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청소년들의 혐오표현이 문제다라고 단정적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혐오를 잉태합니다. 그 혐오표현의 뿌리는 주로 청소년들이 만나는 교사와 부모가 대부분입니다.)

 청소년들의 의사소통 방식이 고립된 또래문화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혐오표현은 하나의 문화 현상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표현 자체를 폭력과 차별로 보고 적극적으로 억제하지 않으면 혐오범죄나 집단적 증오범죄로 조직화할 위험이 있음을 다른 나라에서 이미 충분히 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노인 계층이나 태극기 부대 등과 같은 문제에서 그 단초를 보고 있었고 그 어른 세대의 단초와 동기로 말미암아 N번방 같은 사태가 야기됐습니다. N번방 사태야 말로 혐오표현으로 만들어진 혐오문화가 어떻게 조직적인 혐오범죄로 가는지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혐오는 그 생존 방식과 전파방식이 감염병 바이러스와 매우 비슷합니다. 숙주를 단박에 죽이거나 힘들게 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약하게 만들고 면역이 약한 존재는 죽음에 이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소리나 익명성 뒤에 문자로 조용히 전파되지만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늘어나 있기도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생존하기 어렵기 때문에 끊임없이 스피커를 찾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일간 베스트 사이트와 극우 단체들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진 출처 - freepik


 그것은 때때로 심각하고 장기적인 후유증을 남기기도 합니다. 우리가 학교 폭력의 피해자들이 충분히 사과하거나 보상하지 않은 가해자들을 몇 십 년이 지난 후에도 미디어에서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혐오표현 피해를 당한 후에 어떻게 대처해야할까요?
 우리는 사회적으로 혐오표현을 범죄로 모두가 합의하고 선언해야 합니다. 이후에 모든 범죄의 기본을 따르면 됩니다. 즉 피해자는 피해를 복구하고 보상하고 치료하며 가해자에게는 응분의 책임과 처벌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혐오범죄가 죄질이 나쁜 이유는 성범죄와 마찬가지로 피해자가 가해의 책임의식을 가지고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혐오의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지 않음을 인식시키고 표현하는 것, 가해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혐오에 대하여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평가하거나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합니다. 가해자의 행위와 표현을 단순한 인성적인 해프닝으로 취급하지 말고 책임이 있는 실제적 폭력임을 명확히 할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혐오를 또 다른 혐오로 풀어내는 순환혐오나 자기혐오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특히 장애인 혐오를 들여다보면 그 원리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장애인 혐오의 문제를 사랑이나 배려 따위의 개인의 감정이나 윤리 문제로 바꿔버리거나 실수라고 무마하거나 (이것은 결국 피해자에게 그 책임을 묻는 낙인일 뿐입니다.) 장애인을 혐오하는 것이 진짜 장애라는 표현, 장애인을 혐오하는 미친 짓, 결국 정신 장애인이 하는 일이라는, 또 다른 장애 혐오인 것이지요.


 자폐가 있어서 군대를 가지 않은 21살의 청년을 두고 ‘신변처리 못하는 자폐아라서 슬프다’는 어느 국회의원의 표현이 오히려 어느 악성 댓글보다 청소년들에게는 영향이 클 수도 있다는 사실, 인권을 고민하고 자신의 말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은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특히 부모님과 교사들이요. 그러기를 진정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