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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의미(이회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9-19 15:24
조회
1190

이회림/ 00경찰서


 여행의 영어 표현인 travel의 어원을 아시나요? Travail, 고통, 고난을 뜻한다고 합니다. 익숙하고 안락한 나의 공간에서 떠나 평소보다 긴장된 상태에서 매일 새로운 것들을 만난다는 것. 이 자체가 흥분이 되고 즐겁기도 하지만 정말 피곤하고 힘든 것 또한 여행입니다. 그래서 늘 여행이 끝나면 돌아갈 집과 고향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가 있다는 생각에 안도를 하곤 하지요.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저의 여행이야기를 들려 줄 엄마가 곁에 없습니다. 약 2개월 전에 엄마가 먼저 하늘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거실 창가에 비스듬히 누워서 일본에서 오는 큰 언니를 기다리다가 숨을 거두셨습니다. 마치 낮잠에 스르르 빠지는 사람처럼 조용히 평온한 표정으로 사라지셨습니다. 저는 쳐다만 보고 있을 수는 없어서 직장에서 배운 대로 심폐소생술도 해 보았습니다. 땀과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되는 동안 119 구급대원들이 왔습니다. 엄마의 심장이 완전히 멎은 것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큰 딸은 비행기를 타고 일본에서 오고 있었고 나머지 딸 셋, 아들 하나, 그리고 아빠가 보는 가운데 하늘로 가셨습니다.



사진 출처 - 필자


 저는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스웨덴으로 떠났습니다.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와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그래서 스웨덴의 여름에게 저를 부탁했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스톡홀름의 남쪽에 있는 공원묘지에 혼자 갔습니다.  
“skogskyrkogården” 스웨덴 말로 직역하면 “숲 묘지”이지만 시민들이 공원처럼 드나들어서 인지 “공원묘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정말이지 제가 이 곳에 세 번이나 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첫 날은 맑았고 두 번째 날은 흐렸고 세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마치 꿈 속에서나 봄 직한 풍경을 마주했습니다. 그날의 풍경은 마치 엄마의 하늘나라 일상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푸른하늘에, 싱그러운 초록빛들과 아이들의 순수한 몸짓들. 엄마가 이런 곳, 아니 이 보다 더 아름다운 곳에 평안히 계신다는 생각을 하니 슬프면서도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저는 내내 엄마가 옆에 같이 있다고 상상을 하며 엄마에게 여행 가이드처럼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마음속으로 말이지요. 어쩔 수 없이 매일 눈물 바람이었고 항상 젖은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계속 “엄마,, 엄마” 를 입 속에 되뇌는 것을 멈출수가 없었습니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낄 때, 그리고 내가 나름의 정의와 진실을 위해 어떠한 행동을 최선을 다 했음에도 그것이 오해받을 때 정말로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힘듦은 엄마를 먼저 하늘로 보낸 상실감과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직후에, 제가 심폐소생술을 제대로 못해서 골든타임 안에서도 엄마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하늘로 갔으니 나도 따라가야겠다는 생각이 당연하다는 듯이 저를 엄습했습니다. 그랬다가 엄마가 살아 온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마음을 고쳐먹곤 했습니다. 그리고 엄마 몫까지 열심히 세상 구경을 다니며 돌아다니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번 여행은 엄마가 세상에 없지만 사실상 엄마와 함께한 여행이었습니다. 아마 저는 앞으로 어디를 가든 늘 엄마를 수호천사처럼 생각하면서 다니게 될 것 같습니다.


 이 글의 첫 머리에, 여행의 어원이 ‘고통’ 이라는 뜻의 travail에서 나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고통의 시기는 역설적이게도 항상 제가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야말로 진정한 나와 만나는 시간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안합니다. 전혀 꾸며지지 않은 나를 만나고 싶을 때는 저처럼 훌쩍 혼자 여행을 떠나보라구요. 특히 결혼 안 하신 미혼 여성인 분들이 용기내서 혼자 여행을 많이 떠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상치 않은 기분 좋은 만남, 우정, 사랑, 고통, 후회...결국은 가장 친하게 지내야 할 친구인 나 자신과 고요히 조우하게 되는 순간, 이런 소중한 나날들을 음미해보시길 바랍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다소 외롭지만 그 외로움마저 친구로 만들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고, 그것은 정말이지 하늘에서 특별히 주어지는 선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