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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단 한번도 장애인혐오를 하지 않은 자, 돌을 던져라(김형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5-30 18:15
조회
2108

장애인 혐오의 역사 1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우리는 언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대로 현실을 인식한다.」
 (훔볼트)


 말은 그것을 표현하는 대상에 대해 일정의 가치와 판단을 담고 있고 그것은 언어생활을 통해 전달되고 알려져서 그 말에 담긴 인식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게 된다. 특히 그 말이 특정 계층이나 일부 집단 전체를 지칭하는 것일 경우 그 낱말은 사회적인 규범과 힘을 갖게 된다. 특히 어떤 단어가 사회적 소수나 약자에게 부려지는 것일수록 그 말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중요해진다. 왜냐하면 그 말 자체가 그 사람을 사회적 소수나 약자로 만들어 버리는 힘과 파괴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장애인’을 지칭하는 용어들이 잦아들 여지도 없이 뜨거운 논란을 빚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무슨 용어를 쓰든, 현재 ‘장애인’이란 용어가 모두가 인정하는 법적인 용어이지만 ‘장애(障碍)’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 가치와 그 의미를 가지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이렇게 ‘장애’라는 용어가 가지는 사회적 의식과 가치 및 규범을 잘 드러낸 사건이 바로 것이 2013년 4월에 SNS와 언론을 한창 뜨겁게 했던 이른바 대학생들의 J.M 미팅 사건이다.


 대학생 미팅을 나온 남학생들의 무리가 장애인 교육을 전공하는 학생들에게 ‘장애인’버전으로 군대식 자기소개를 하자(사실 남학생들이 상대방에게 제안을 했는지, 본인들이 먼저 하면서 당신들도 한번 해 봐라는 것이었는지, 자기들끼리만 그렇게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는 식으로 행사를 진행하면서 불거진 이번 사건은 그 남학생들의 상식 밖의 저급한 행동이었다는 1차원적인 분석 이외에도 몇 가지 중요한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관계를 보여준다. 그 행위 자체에 대한 해석과 의견들 속에서 ‘장애’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진실과 본질을 은폐하는 강한 권력 자체가 더 큰 문제이다.


 자행한 불특정 장애인 다수에 대한 모욕과 장애인 관련자에 대한 간접 차별이라는 범죄 사실도 중요하거니와, 장애(障碍)라는 말이 독자적으로 지금도 우리 언어생활에서 폭넓게 쓰이고 있기 때문에 장애(障碍)라는 단어 자체가 그 의미가 변화하든지, 장애인이란 단어 자체가 장애(障碍)라는 단어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쓰이지 않는 한,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낙인 효과는 계속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사건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자신의 인격으로만 인정받고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장애(障碍)’만이 부각되고 설명되는 용어라면 그 뒤에 어떤 낱말이 붙든 그것은 차별과 소외를 위한 낙인(烙印) 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 당사자의 의견과 관계없이 함부로 누구를 장애인으로 지칭하거나 규정하는 것은 늘 신중해야 한다. 또한 장애(障碍)란 용어가 불명확한 이유는 장애의 반대의 개념-상투적으로 정상(正常)-인 비장애(非障碍)를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고 바로 절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용어 자체는 ‘장애인’을 차별하고 소외시키고 있는 현실을 만들어 갈뿐 아니라, 장애인으로 하여금 그 차별과 소외의 책임이 자신의 ‘장애’에 있다고 장애인은 끊임없이 교육받고 사회화된다. 장애인은 그의 장애라는 ‘차이’로 그 개별성(individuality)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애를 극복해야한다는 당요 아닌 강요를 사회로부터, 타인으로부터 끊임없이 받는다.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를 차이로 ‘인정’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장애가 늘 극복해야 하는 큰 장애물(障碍物)이고 극복하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는 논리와 이념이 녹아있다. 우리의 장애인이란 장애(障碍)라는 단어에는.


 따라서 그 낱말을 쓰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에게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낙인(stigma)을 심어줄 정치적, 문화적 위험이 있다. 특히 이런 단어들은 순환 혐오를 생성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이 바로 ‘장애’입니다.’ 이런 표현 등이다. 문맥 적으로, 발언상으로는 의도는 충분히 존중할 만하지만 언어 철학과 논리로는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부정적이고 혐오적인 발화는 무한 반복되고 있는 꼴이다.


“경솔하고 천박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면 재빨리 마음을 짓눌러,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단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해로움이 따르게 될 텐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 후기 이덕무 수양서 <사소절(士小節)> 중에서


누구인가? 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인가’ 가 문제이다.


 


장애인 자조모임에서 김포 특수학급에 재학 중인 어느 지적 장애인 고등학생이 적어준 학교생활에서 상처받은 말들. 주로 중학교 재학 시절 받은 ‘언어폭력’들이었다. 이것을 적어준 학생은 지적 장애인 중에서도 그 능력이 상위 0.01%에 분포하는 학생이었고 겉으로 장애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학생이었다. 학생이 다니던 중학교나 고등학교가 그나마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나쁘지 않는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자조모임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당사자 스스로를 장애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학교 진학 후 받은 언어폭력으로 상처가 깊었고 혼란스러워 했다.
사진 출처 - 필자


 모든 인간의 삶에 출발점은 자기의 의지에 따른 선택이 아니다.
 그건 마치 수없이 많이 포장된 같은 초콜릿 속에서 그냥 하나 집어 들어 포장을 벗겨 먹듯이1) 우리의 삶은 처음에는 자신의 의지에 관계없이 처음의 운명에 따른다. 그 벗겨 먹을 포장은 여성일 수도 남성일 수도, 백인일 수도, 흑인일 수도 있고 부자 일수도 가난할 사람도, 뇌병변 장애인일 수도, 지적·자폐성 장애인일 수도 있다. 동성애자일수도 있다. 그 누구도 그래서 당사자에게는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따라서 그러한 무의지로 선택받은 삶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 불평등이나 부정적 차별, 즉 불리(Handicap 2) )를 가할 자격은 없다. 신체적 정신적 ‘장애’ 역시 의지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어떤 구체적인 질병이나 증후군들을 ‘장애’라고 구별하는 것은 환자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더 이상 병원에서 머무르지 않을 때이다.


 어떤 사람을 ‘언제’ 우리는 장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즉 장애인이라 부르는가? 누구의 자녀를 항상 장애인 아들, 누구의 애인(愛人)을 늘 장애인이라 칭하지 않는다. 법리적으로 이론적으로는 어떤 사람이 사회적인 존재로서 사회적인 활동을 할 때 사회적인 지원을 한정된 자원으로 해야 ‘할 때’ 예를 들어 장애인 화장실을 이용해야 할 때, 장애인 주차장을 사용해야 할 때, 학교의 특수학급의 지원이 필요할 때이다. 즉 제한적인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공급하기 위해서, 그렇게 어떤 개인에게 국가적인 사회적인 지원이 필요할 때 장애인이라 부르기로 약속했다. 모두가 그 약속에 투철했다면 애초에 그 약속자체에는 혐오와 차별이 없었을 것이다.3)


 그러나 사회학자 Meyerson은 “장애란 한 개인에게 객관적인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가치판단에 의해 필요에 따라 규정되어 지는 것”이라고 하면서 장애4)란 다른 사람이 그 사람과 사실에 대하여 충분한 이유가 있건 없건 간에 사회적으로 그런 사람에게 불리한 제재를 가하게 되는 조건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정적인 자원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분류하고 지원하기 위해 또는 그 사람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렇게 부르기로 한 과학적인 진단 대상의 사람이 또는 관찰의 대상이 어느 때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면 오히려 한정적인 지원을 빼앗아 가는 사람으로 공격받기 시작한다. 우리나라 언어에서 역사상 병신(病身)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할 때는 사실 그대로 어떤 사람 몸에 병이 들어있는 사실 자체나 그런 육체를 지칭하는 의학 용어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런 사실이 없는데도 그렇게 부름으로서 그 용어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와 모멸감 수치심을 주는 power를 갖는 도구가 되었다. 이것이 존재하는 실체를 의식적으로 인지하는 자의적인 연결 고리였던 언어가 사람들 간의 관계를 결정하는 힘을 갖는 이유인 것이며 사람을 통제하는 강제적이고 부정적인 힘을 갖는 순간 언어와 낱말은 폭력이 되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이 폭력의 위협을 느끼고 폭행당한 것처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받으며 심리적인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언어폭력이다. 언어가 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폭력’이 얻고자 하는 효과와 의도를 제공해 준다면 그게 언어폭력이다.5) 6·70년대는 병신(病身)이란 단어가 8·90년대는 장애자(障碍者)라는 단어가 2000년대 초반에는 장애인(障礙人)이란 단어였으며 이제는 상태나 현상을 나타내는 장애(障礙)라는 단어가 ‘인격’이나 사람 자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는데, 2013년부터 인터넷으로 중심으로 사용되다가 공영 방송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결정 장애’라는 단어가 대표적이다. 병신(病身)이나 장애인이란 대상을 이르는 단어가 병신같다. 병신 같은 놈이란 것으로 ‘너 장애인이냐’ ‘애자스럽다’라는 식으로 확장되면서 그런 사람들의 공간자체를 비하하거나 공격하거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방향으로까지 확대되어 가고 있다. 6) 다시 말해 장애인이란 낱말과 개념이 ‘차별’과 ‘소외’라는 언어들과 동일시 될 만큼 그들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현존하며 역사성을 띄면서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 진행하고 있다.


1) 영화 ‘포레스트 검프’ 중에 나오는 대사 인용. 이것은 영화 ‘제 8요일’에서 유효적절하게 패러디 되었다.

2) 가장 먼저 장애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이 용어에 대한 기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원래 이 용어는 경마할 때 사용한 용어로서, 어떤 말의 기량이 뛰어나서 계속 우승한다면 내기가 안 된다. 모든 사람이 그 말에게만 베팅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말에게 납덩이를 달아준다. 그 납덩어리 무게만큼 그 말에게는 악조건이 된다. 그래서 경기는 비등하게 되고, 그 말이 우승하게 되면 납덩어리 무게를 조금씩 늘려 간다. 그 납덩어리를 핸디캡이라고 부른다. 이 말이 장애인에게 사용되기 시작한 근원은 정확하지 않지만, 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장애를 납덩어리와 같다고 본 게 아닐까 싶다. 이 말이 장애인에게 사용될 때는 handicapped people이나 handicapped person으로 사용된다. 이 말은 영어권 뿐 아니라 프랑스어권에서도 널리 사용되며, 프랑스에서는 지금도 옹디까페(handicapped)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장애인의 장애를 불합리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 때문에 요즘엔 거의 사용되지 않으며, 1981년부터 WHO에서 ICHID-1을 정하면서 handicapped는 개인의 장애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장벽을 지칭하는 것으로 정리되고 있다. 「The Barrier Free University Recademy Binder Book」(2002, 장애인편의시설촉진시민연대, 배융호)


3)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왕은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 시각 장애인이 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오이디푸스가 사회적 가치판단에 따라 장애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장애의 의지적 선택이 아니다. 여기서 사회적 가치판단이라 함은 ‘장애’가 사회적, 개인적 분리를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유리(advantage)를 가져다주는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병역을 회피하기 위하여 무릎 수술을 하는 경우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회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것이므로 이 또한 장애의 의지적 선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4) 원형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정상이나 미완성이란 주장이 정당화될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 병리학적인 비정상은 주어진 환경에 의해서만 병적이란 사실과 어떤 생명체라도 살아가는 환경과 더불어 진화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분석된 징후들 이것을 비정상이라 규정하는 것이라 한다면 최종적인 것이라 단정 지을 수 없다. 장애는 특성이 아니고 현재의 상태로 보아야 하며 장애는 특정 조건하에서의 기능상의 제한을 의미한다. (「지식인의 종말 I.F. suite et fin」레지 드브레, 강주헌 역, 예문 2001)


5) 이를 발화효과행위 perlocutionary act라고 할 수 있다.


6) 이런 표현들이 표현의 자유라거나 문학적 허용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데 “병신”이라는 말이 장애인 비하인지 아닌지 판정할 언어적 권리가 왜 비장애인한테 있는가. 이는 오스틴을 따라, 그리고 랭턴의 논의를 따라 “병신”이 혐오발언인지 아닌지 판정하는 말 그 자체가 권력을 가진 사람이 발화하는 ‘판정발화 verdictive’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