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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생존자’이자 본받고 싶은 ‘멋진 친구’를 소개합니다(이회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9-04-24 13:18
조회
876

이회림/ 00경찰서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 당시 저는 서울시내 모 경찰서 형사과에서 성폭행 피해자 수사를 전담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출근하면 만나는 사건이 늘 강제추행, 준강간, 강간, 특수강간 등등 오로지 성범죄 사건만 담당하기를 2년이 넘게 되자 마음이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힘든 점은 바로 생존자들 앞에서 눈물을 참는 것이었습니다.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는 형사가, 누구보다도 마음이 아플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자격 미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섣불리 동정하는 모습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떤 때는 책상 아래에서 손등의 얇은 살을 꼬집어 가며 감정을 추스려야 할때도 있었습니다. 금방이라도 자살을 할 것만 같은 분들을 만나게 되면 한동안 사적으로 만남을 이어가며 괜찮은지 확인하지 않으면 마음이 늘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형사과 3년째부터는 되도록 성범죄 사건을 전담하는 형사가 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기사를 통해서 8세 소녀가 화장실 안에서 성인 남성에게 몹쓸 짓을 당한 사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발생한 지 한참이 지나서 수사기관에서도 이미 조사가 다 끝난 후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그 기사를 읽고 나서부터는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괴로워졌다는 것입니다. 머리속에 온통 그 피해 아동 생각뿐이었습니다. 그 아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고민 끝에 아이가 심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는 해바라기 아동센터로 전화를 걸어 센터 직원에게 제 소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든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며칠 후 아이의 아버지께서 저에게 직접 전화를 해 오셨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처음 만났던 때를 떠 올리면 지금도 코끝이 시큰해 옵니다. 그때도 저는 동정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탁자 밑에서 연신 손등을 꼬집어 댔습니다. 첫인사를 나누던 순간, 저는 다짜고짜 귀여운 무당벌레 모양의 초콜릿을 아이 앞에 불쑥 내밀었습니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환하게 조명이 켜지며 생기가 도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날 이후로 그 아이가 웃을 만한, 좋아할 만한 선물을 구하는 것이 저의 즐거운 숙제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병원을 함께 가는 것으로 만남을 시작하였지만 조금씩 다른 장소에서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린이대공원, 롯데월드 등 놀이공원도 함께 다니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아이의 두 살 터울 언니도 함께 만나 다 같이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아이와, 아이의 언니 그리고 저, 우리 셋은 점점 친척처럼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주말에 예쁜 카페에 모여 수다를 떨고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를 보며 따라 그리기도 하고 홍대에 있는 합주실을 빌려 드럼치고 기타 치며 놀면서 ‘츄러스’라는 제목의 밴드를 결성해 보기도 했습니다. 합주연습 1회로 끝난 일회용 밴드였지만요.


 회색빛 도시가 답답하게 느껴지면 셋이서 혹은 둘이서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겨울 바다를 보러 문무대왕릉이 있는 감포 바닷가로 가기도 했고, 4월이면 벚꽃구경을 하며 함께 꽃비를 맞아 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재미나게 노는 동안 어느덧 10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아이가 고3을 잘 버텨내고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우리 셋은 벼르고 벼르던 해외여행까지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가까운 일본의 오키나와로 2박 3일간 짧게 말이죠. 오키나와의 1월은 포근한 가을 날씨여서 참 좋았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제가 제일 좋아하는 토카시키 섬의 아하렌 비치에도 데려가고 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해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키나와에서도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왔습니다. 셋이 함께 해변에서 BTS의 <고민보다GO>를 부르며 ‘탕진잼 탕진잼~’하면서 안무를 따라 춰 보기도 했습니다. 어설피 ‘탕진잼’을 따라 추던 저에게 안무가 틀렸다며 디테일한 지적을 아끼지 않던 모습은 정말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습니다.



사진 출처 - 여성신문


 10년 전, 제가 이 아이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을 때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 친구를 10년 뒤에도 만나고 있을까?’ 라구요.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이 친구와 계속 만나고 있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인연을 끊게 될 이유라는 것이 있을까? 싶었습니다.


 10년이 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니, 저의 예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친구가 제 곁에 있는 것이 든든합니다. 왜냐하면 전쟁과도 같은 피해를 입고도 용감무쌍하게 삶을 살아내고 있는, 그야말로 엄청난 생명력을 가진 생존자이니까요. 가히 어벤져스 급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큰 수술을 받느라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여덟 살 무렵에도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들을 멋드러지게 그려주면서 각각의 캐릭터를 설명해주면서도 웃어댔고, 그 만화에 영향 받은 것이 틀림없는 실없는 농담을 저에게 툭툭 던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원스탑인권센터에서 피해자 조사 업무를 하고 있던 2012년 여름, 언니랑 둘이서 함께 사무실로 놀러온 적이 있었습니다. 사무실 안을 리모델링 중이여서 벽에 아무것도 없어서 썰렁한 분위기였습니다. 뭔가 디자이너의 숨결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그 황량한 하얀 벽에 붙어 서서는 슥슥 뭔가를 장난삼아 그리는 것 같더니만 제가 은행나무 잎을 꽂아 둔 전기 스위치 옆에다가 팬더곰 한 마리를 그려놓았습니다. 순간, 차가워만 보이던 흰 벽에 따뜻한 온기가 확 퍼지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팬더곰의 축 처진 눈은 말이죠,
‘나도 너희들 아픔을 잘 안다, 그러니까 기운 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대학생이 되면서는 어려움에 처한 타인을 돕는 일과 연관 있는 학과에 진학을 했습니다. 와~ 정말이지 도대체 얼마나 더 강해지려고 그러는지, 저는 앞으로도 더 곁에서 귀찮게 하고 같이 놀자고 보채면서 어깨너머로라도 좀 더 배워야겠습니다.


※위 내용은 ‘이회림 저. “미친놈들에게 당하지 않고 살아남는 법” - 청림출판-
<제 5 장 당신은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를 일부 인용, 재구성한 글임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