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내 고향 음미하기 + 매직 아워 (이회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10-04 16:19
조회
911

이회림/ 00경찰서


 제 고향 경주는 온통 무덤 천지입니다. 계절마다 색다른 자태를 뽐내는 보면 볼수록 매력 있는 무덤들 천지입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못 보면 그리운 마음까지 듭니다.


 보통 무덤은 교외나 산에 숨어 있는데 경주는 동네마다 크고 작은 고분 공원이 있습니다. 임신한 언니와 함께 무덤을 탑돌이 하듯이 돌며 산책하고, 세상 밖으로 나온 조카를 안고 나와서도 산책하고 또 얼마 뒤 걸음마를 배우게 된 조카의 손을 잡고 나오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죽은 자와 산 자가 더불어 사는 땅이라고 해도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안 그런가요?


 네 살 배기 조카가 산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모! 저기 되게 큰 무덤이 있어!”라구요.
 ‘산’이라는 단어와 ‘산’의 모양을 배우기 전에 무덤, 고분, 능, 이런 단어들을 먼저 배운 조카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요. 산이 삶이라면 무덤은 죽음일진데, 제 조카의 눈에는 크다 작다의 차이 정도인가 봅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 에서는 언어학자인 여주인공이 어떤 특별한 경험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삶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 여주인공이 알게 되는 비밀이라는 건, 이름 모를 고분들이 그들의 존재 자체로 웅변하는 그것과 일맥상통했습니다. 아직 영화를 못 보신 분들을 위해 그 비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눈치빠른 분들은 이미 알아차렸을 것 같지만요.



사진 출처 - 필자


 지금 저는 정면으로 커다란 고분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2층 창가자리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자연스럽게 깎여서 만들어진 부드러운 능선을 보고 있노라면 제 마음도 덩달아 보들보들 잘 다듬어 지는 듯 한 느낌이 듭니다.


 창밖은 조금씩 땅거미가 내리는지 대기가 푸르스름해 지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시간대의 풍경을 참 좋아하는데요. 이렇게 해가 기울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이 석양에 물들고 해가 질 때까지의 시간을 ‘매직 아워’라고 부른답니다.


 사진·영화계의 전문 용어인 ‘매직 아워’는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새벽녘부터 일출 직전까지, 해 진 후 땅거미가 지는 저녁녘부터 어둠이 덮이기 직전까지를 일컫습니다. 대기에 푸른빛과 붉은빛,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면서 매혹적이고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특별한 시간이죠.


 요즘처럼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필름 카메라를 이용해서 사진을 찍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노출계를 따로 사서 하늘과 땅, 건물, 사람 등 내가 프레임에 담고 싶은 것들을 향해 들고 노출값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지금 제 앞에 보이는 풍경을 예로 들어, 큰 무덤과 그 앞을 지나가는 빨간 점퍼를 입은 사람과 무덤 뒤로 보이는 갈색빛 나무 그리고 하늘까지 모두 한 프레임 안에 담고자 한다면, 이렇게 4 개의 피사체가 가진 각각의 노출값을 찾아낸 후에는 이들의 평균값, 즉 ‘적정노출’을 도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노출값이라는 것은 햇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고 특히 해질 무렵이 되면 색온도의 변화가 가장 많아 적정노출 값을 완벽히 구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사진 찍기 가장 불편한 시간일 수가 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에 가장 색감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사진이 찍힙니다.


 영화감독 테렌스 맬릭은 ‘천국의 나날들’이라는 영화의 야외장면을 모두 ‘매직 아워’에 찍었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그 당시 시력을 잃어가고 있던 촬영감독 ‘네스트로 알멘드로스’에게 맬릭 감독이 모든 야외 장면을 인위적 조명 없이 부드러운 자연광으로, 오직 ‘매직 아워’에만 찍어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맬릭 감독의 이 같은 고집 덕분에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밀밭을 배경으로 ‘세계 영화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는 영화가 탄생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의 내면엔 절반은 천사, 절반은 악마가 있다.”
 이 영화 안에서 관찰자 역할을 하고 있던 소녀의 대사입니다.


 매직 아워에 촬영한 덕분에 어스름 속의 사물과 풍광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같이 낯설고 불안하기도 한 미묘한 느낌을 줍니다. 영화는 그렇게 마술 같은 순간들을 화가가 점묘화를 그리듯이 섬세하게 담아냅니다. 매직 아워는 낮과 밤의 경계에서 변화무쌍한 노출값을 가지고, 천국의 나날들은 선과 악의 경계에서 아름답게 빛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좋은 순간, 나쁜 순간을 동시에 품에 안고 살아갑니다. 특히 범죄 피해 경험을 가지면 그 나쁜 순간이라는 것이 정말로 진하게 눈앞에 불쑥 불쑥 나타나니 참 귀찮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런 모든 좋고, 나쁜  순간들을 모두 모아놓고 저기~ 멀리서 쳐다 보다보면 아주 변화무쌍하고 아름다운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매직 아워에 노출이 마구 변하지만 가장 풍부하고 아름답게 남듯이 말이죠.
자~ 10월 초이니, 슬슬 가을 향기가 진해지려하는 경주입니다.


 올 가을에는 당일치기든 1박 2일이든 모두 경주여행 한 번 오시기를 권합니다. 무덤 위로 내려앉는 석양과 매직 아워, 저 혼자 즐기기엔 미안할 정도로 사랑스러우니까요! 어서오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