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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김아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03-21 17:50
조회
1265

김아현/ 인권연대 연구원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


 자칭타칭 이제는 ‘작가’가 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전 의원’의 말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개혁국민정당(이하 개혁당) 창당 당시 당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수면 위로 불거졌을 때다. 정확히는 2002년의 일이다. 이 발화의 대상은 해당 사건을 비판하는 여성 당원들이었다.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작은’ 문제로 당의 에너지를 소진하지 말자는 주장을, 그는 타고난 문장가답게 간명한 비유로 갈음했고 이는 종종 회자되었다. 십 여 년도 훨씬 전의 일이지만 미투 이후 최근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일들을 보며 저 말을 떠올렸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행여 저 말이 실수에서 비롯되지 않았더라도,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각과 인식이 변하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십 여 년 전의 ‘그의’ 발언을 이제와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작가를 자임하며 이런저런 사회적 책무와 공인으로서의 무게를 벗어낸 그가, 최근의 미투 사태를 관조하며 본인이 정치인(개혁당 대표집행위원)이던 시절 한 말을 어떻게 떠올릴지는 모르겠다. 사실 별반 궁금하지도 않다. 유시민의 말이지만 유시민만의 말이 아니어서다. 저런 말과 태도는 이른바 ‘큰 일’을 한다고 자임하는 사람들에게서 지금도 흔히 볼 수 있고 아마 앞으로도 종종 볼 수 있을 거다(더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는 주장과 태도는 때로 합리적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폭력이 된다. 중요한 것은 원칙이고 그 적용이다. 민주화투쟁이든 노동운동이든 인권운동이든 정치 등을 하면서 내세우는 목적이 공동체의 이익과 발전에 있다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도 좋다는 태도가 적어도 부끄러운 것인 줄은 알아야 한다. 작은 문제로 여기고 희생을 강요해 온 것이 특히 타자의 고통이라면 더더욱 강한 자기검열을 해야 한다. 경제발전이 우선이라며 수 십 년 간 용인하고 넘겼던 크고 작은 비리와 불합리들이 내 삶을 불행하게 하는 거대한 악이 되어, 우리를 맵찬 추위 속 방방곡곡에서 촛불을 들게 했다는 것을 굳이 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진 출처 - freepik


 크고 작은 성폭력, 위계나 경제력 차이에 의한 갑질은 늘 있어왔고 그를 향한 문제제기와 폭로 또한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미투라고 명명되고,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이 바뀌었을 뿐이다. 심지어 수 십 년간 한국의 납량을 책임져 왔던 [전설의 고향]을 관통하는 소재들도 주로 폭로였다. 언로를 얻지 못해, 귀신이 되어서도 그 한을 어쩌지 못한 약자들의 ‘폭로’이자 ‘호소’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한국사회 전설의 뼈대를 이루지 않던가. 2009년을 마지막으로 종영한 [전설의 고향]을 최근 우연한 기회로 다시 보며 흠칫 놀랐다. 여성과 약자를 희롱하고 착취하고 심지어 죽이고 나서도, 상대가 한을 갖지 않고 용서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설파하는 삿된 욕망이 주류사회의 유구한 전통이었구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사회가 일상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저질러 온 크고 작은 폭력을 새삼 ‘발견’하고 ‘경악’하고 가해자를 ‘비난’하는 데서 이 바람이 그칠까 두렵다. 근거 없는 두려움이거나 기우라면 좋겠다. 하지만 미투가 바람직하지 않은 형태로 변형되어 광고카피로 쓰이며 조롱거리로 다뤄지거나, 이제는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공공연히 들리거나, 자기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가해자인 특정 피해에 대해서는 음모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의 근거를 찾는다.


 거창하게는 단군 이래 반 만 년이 흘렀고 가깝게는 87년 이후로 30여년이 지났다. 한반도에 서식하는 구성원들의 변화가 단지 먹고 입고 자는 일에 그쳐서야 될 일인가 싶다. 성폭력과 갑질의 직접적 가해자에게 향하는 남성사회의 비난이, ‘나는 저런 자들과 다르고 (바로 옆의 피해와 고통을 눈치 채지 못한 나는 무관심하고 무지했을 뿐) 무고하다’라는 구분짓기 혹은 자위에 그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는 수준까지는 나아가길 바란다. 그래야 2018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