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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의 무게 (김아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2-06 17:23
조회
1148

김아현/ 인권연대 연구원


“그 피자, 범죄자들 주는 거에요?”


 대놓고 불쾌한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사님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놀람과 비아냥이 분명 섞여 있었다. 열 판의 피자를 들고 30여분을 걸어갈 자신이 없어 잡아탄 택시였다. 초겨울 쌀쌀한 공기에, 들고 가는 동안 방금 만든 피자의 김이 식을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뒷좌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구치소로 가자고 했을 때 기사님은, 젊은 아가씨가 들고 가기 벅차했던 상당한 양의 피자가 구치소 재소자들에게 주려는 것임을 알고는 저렇게 물었다.


 한 달에 삼일 일정으로 인권연대가 진행하는 평화인문학 마지막 날엔 그동안 강의를 듣느라 수고한 수강생, 그러니까 구치소 재소자들에게 피자를 드리곤 한다. 토핑이 화려하고 값이 많이 나가는 피자를 드리지는 못하지만, 구치소 가까운 곳에 있고 가성비가 꽤 좋기로 알려진 곳에 신경 써서 미리 주문을 하고 시간에 맞춰 픽업하러 간다. 밖에서는 흔하고 쉬운 음식이지만 안에서는 귀한 음식이라고 생각하면 그 피자배달, 보람도 있다.


 택시기사님과 의견이 다를 때는 을이 되어야 잠깐의 안전과 평화를 확신할 수 있다는 경험치를 쌓아왔기 때문에, 그분과 언성을 높이거나 각을 세울 수는 없었다. 그리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조근조근, 그러나 빠르게 내 할 말을 해야 했다.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해도 사기와 횡령이 되어 경제범으로 저 안에 갇힐 수 있다고, 지금 서울구치소 독방에 계시는 분이 집권하는 동안 그런 경제범들이 아주 많이 늘었다고, 기사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구치소 재소자들이 그렇게 악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아닐 수 있다고, 실정법을 위반한 게 그가 나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라고.


 기사님은 ‘좋은 일 하신다’면서도 위의 말에 반응하기보다는 피자를 구입한 돈의 출처를 더욱 궁금해했다. 세금으로 범죄자들에게 피자 사 주는 것 아니냐는 거였다. 그 분이 걱정하는 것처럼 ‘혈세’로 나가는 돈이 아니라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구치소 앞에 차를 세워주는 기사님 목소리에서 불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차로는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를 달리는 동안 주고받은 대화는 짧았지만 택시에서 내려 구치소로 들어가는 동안 명치에 쌓인 답답한 기분은 열 판의 피자보다 무거웠다. “죄 지은 사람은 피자 먹으면 안 되나요?” 라는 한 마디를 했어야 했다는 후회가 아직까지 남았다.



사진 출처 - 구글


“아우, 걔네들한테 무슨 피자를 먹여. 밥이랑 반찬이면 되지.”


 그녀는 이른바 사모님이다. 넉넉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란 덕에 비슷한 연배에 비해 공부를 많이 했고, 남편도 꽤 잘 나가는 지위에 있었다. 일을 하지 않아도 경제적으로 부족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를 할 시간도 주어졌다. 그녀가 하는 봉사라는 것은 이를테면 보육원이나 조손가정의 아이들에게 주기적으로 쌀과 반찬, 학용품들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몸 위에 두른 것으로 자신의 부를 과시하지 않으면서도 기품은 놓지 않는 미적 감각도 지녔다. 그녀의 활동이 알려지자 지역사회에서 존경도 받게 되었고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녀가 하는 좋은 일을 함께 하려는 사람들도 제법 생겨났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이들에게 줄 특별한 선물을 논의하던 어느 자리에서 그녀는 위와 같이 말했다. 누군가 ‘만날 주던 쌀과 부식 말고, 피자나 브랜드 운동화 같은 것을 선물하는 것은 어떤가’ 하며 낸 의견에 대한 답이었다. 그녀보다 오래 봉사하지도, 많은 돈을 부담해오지도 못했기 때문인지 그 자리에서 대번에 그녀의 말에 토를 단 사람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 한 마디는 그걸 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남았고,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그 일로 그녀는 아마 조금 외로워졌을지도 모른다.


 그간 그녀가 해 온 좋은 일의 무게를 굳이 깎아내릴 일은 아닐 것이다. 두루 동의할 만한 철학으로 해 온 일이건 아니건, 그녀는 분명 좋은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설령 그녀의 활동이 위선이라 해도 위악보다 위선이 백 배 낫다. 누군가의 위선 덕에 하루의 근심을 덜고 이웃의 존재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도 가치 있다.


 하지만 그 한 마디에는 ‘하루하루 먹고 자고 싸는 일만 해결하면 다행인 존재, 의식주를 벗어난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욕망을 드러내면 안 되는 존재, 결국 인격과 개성을 지닌 인간이기 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존재’로 자신이 돕는 아이들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갸웃거리게 하는 위력이 있었다. 가난이, 그것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의 인격을 모르고 지나쳐도 된다는 말과 같지는 않을텐데.


 욕을 하고, 대놓고 손가락질을 하는 것만이 혐오는 아니다. 그리고 모든 혐오가 나쁜 것은 아니다. 욕하고 싫어해도 좋은 나쁜 짓은 꽤 많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를 차별하고, 무시하고, 상대가 어떤 지점에서 상처를 받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행위도 넓은 의미에서 혐오다. 그래서 혐오는 가장 낮은 곳, 가장 약한 고리를 향해 흐르고 자주 정당화되곤 한다. 관습과 논리와 도덕의 탈을 쓴 채로 유통되고 굳어진다. 농담인데 뭐 어때, 네가 예뻐서 그 남자가 그랬나보지, 걔네들에게 피자라니 과분하지, 범죄자는 피자 먹으면 안 돼. 성희롱에 가까운 말에 정색하는 동료직원에게, 용기 내어 성폭력을 신고한 피해자에게, 가난하고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실정법을 위반한 사실이 발각되어 갇혀있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무심결에 내뱉는 말들에 혐오가 있다. 그리고 그런 말을 쉽게 하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그게 혐오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피자를 먹으려면 값을 치러야 한다.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나 가난한 아이들이 사 먹을 수 있는 피자와, 연봉이 어마어마한 사람이 먹는 피자의 값이 같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피자를 먹는 입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은 기억해도 좋지 않을까. 삶을 욕망할 권리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