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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바람만이 아는 대답 (이은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4:57
조회
348

이은주/ 청년 칼럼니스트


무대 위 눈부신 조명 아래, 정갈하게 단복을 맞춰 입은 합창단이 지휘자의 손짓에 따라 입을 모아 노래하고 있다. 그 사이로 다소 낯선 차림이 눈에 띈다. 형형색색의 노동조합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섰다. 그들의 합창은 저마다의 목소리로 퍼져나갔다.


서울의 한 아트센터에서 열린 이소선어머니 합창 공연에 다녀왔다. 여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파업과 쟁의를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도 함께 모였다. 쌍용자동차, 동양시멘트, 콜트·콜텍, 철도노조 등 각계에서 모인 노동자들은 무대 위로 깜짝 등장해 ‘연대의 광장으로 모이자’, ‘해방을 향한 진군’ 등 노동가를 경쾌히 합창했다.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에 맞춰 아름다운 하모니로 재탄생한 노동가의 완벽한 변신에 연신 감탄하는 도중, 사회자의 긴급지령(?)이 들려왔다. “지금 극장 측에서 무슨 얘기가 들어왔는데, ‘투쟁’이나 ‘싸움’ 이런 얘기를 조심해달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사회자의 너털웃음과 함께 나를 포함한 관객석은 순간 웃음바다가 됐다. 그런데 어째 웃음의 뒷맛이 씁쓸했다. 2016년에, 그것도 표현의 자유가 십분 보장되어야 할 공연장에서 특정 단어를 언급하지 말라니. 지금으로부터 50여년은 회귀한 듯한 구시대적 문법에 다들 어처구니가 없어서 기가 찬 웃음을 내뱉었으리라, 생각했다. 극장 측의 의중을 추측해보자면 노동자들의 바람과 열망을 담은 이 합창이, 문화시민이 즐기는 공연의 ‘고상함’을 해치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아니면 ‘아트센터’라는 이 문화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수준의 단어라고 생각했다던가.


그들에게 노동자들의 노래는 왜 예술이 될 수 없었을까. ‘투쟁’, ‘해방’, ‘단결’…. 공연장에서 이런 말들이 들리는 것조차 ‘조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 극장 직원처럼,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운동을 다소 왜곡되게 인식한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를 표현하는 수식어는 ‘과격한’, ‘급진적인’, ‘폭력적인’이다. 우리나라의 산업화·근대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문제를 함께 논의해나가야 할 ‘대화의 대상’이 아닌, 어떻게 해서든 반기를 들지 못하게 막아야 하는 ‘탄압의 대상’으로 그려져 왔다. 이들은 ‘투쟁’이나 ‘쟁취’라는 단어로,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사회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트센터의 ‘고상함’을 해칠까 우려했던 극장 직원처럼, 많은 사람들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노동문제에 대한 각종 잡음들을 편집하고 싶어 한다. 이 정도 되면 노동자의 노래가 예술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문제를 걱정하기 이전에,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찾기를 위한 의사결정 과정인 노동운동도 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행위’가 맞는지에 대한 걱정부터 해야 할 판이다.


역설적이게도, 노동문제를 사회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는 ‘편집증’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작동되기도 한다. 이는 다수의 노동자들이 자기부정을 하는 식의 시도로 이어진다.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블루칼라 노동자와 구별되고 싶어 하는 의식이나, 우리나라의 많은 사무직 노동자와 고임금노동자들이 ‘노동자’보다는 ‘근로자’에 귀속되고 싶어 하는 의식(아마도 ‘노동자’는 과격한 이미지, ‘근로자’는 근면성실한 이미지로 표현돼 보다 더 고상하고 귀한 뜻으로 여겼을 테다)은 노동자 스스로의 계급에 대한 자기부정과 함께, 자신들로부터 노동문제를 ‘타자화’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대형마트 비정규직의 부당 해고 문제를 그린 영화 <카트>에서 한 등장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정규직이 뭐가 아쉬워서 노조를 만듭니까?” 이 장면은,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에게 정규직이란 ‘오르지 못할 벽’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에 육체노동, 사내하청 노동, 비정규직 노동 등 하층 노동자에 대한 차별의 시선을 어렴풋이 느끼게 한다.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은 가장 어두운 곳으로 밀려난다. 고대 로마에는 ‘사회로부터의 배제’라는 형벌을 받은 죄인을 가리키는 사람들, ‘호모 사케르’가 있었다. 이들이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더라도 그들을 죽인 자는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았다. 마치 영화 <설국열차>의 꼬리 칸 사람들처럼, 그들은 사회공동체의 바깥 테두리에서 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희생양으로 바쳐지기도 한다. 또한 죽음을 통한 대속(代贖)조차도 금지된 존재였다. 올해 인천의 한 지하철역에서 50대 청소 노동자가 사다리에서 떨어져 숨지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안전모만 썼어도 살 수 있었지만, 계약직이었던 고인에게는 예산 부족으로 인해 안전모가 지급되지 않았다. 같은 사회공동체 속에서 살면서 구성원들 사이에서 배제를 당하는 호모 사케르처럼, 이들은 노동자 층 내에서도 철저한 소외와 고립을 느끼며 살아간다. 노동자들을 호모 사케르, 즉 희생양으로 고립시키는 인식체계는 이 사회를 공존의 사회가 아닌 차별의 사회로 만든다. 호모 사케르에 대한 외면과 무관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사회의 병폐는 해결되지 않는다.


20161102web02.jpg사진 출처 - 필자


우리는 가방 속에 공구통과 컵라면만을 남기고 떠나간 구의역의 비정규직 청년을 기억한다. 청년은 끼니를 때울 수조차 없도록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 비인간적인 노동 시스템에 희생양으로 올라타야 했다. 이번 이소선합창단 공연의 이름은 ‘종이담쟁이’였다. 구의역 청년에게 전하는 미안함과 슬픔과 분노를 담은 포스트잇 종이가 스크린도어를 넘어 담쟁이넝쿨을 드리웠듯, 우리 사회 소외된 자들을 위로하는 마음을 널리 퍼뜨리자는 의미이다.


“바람이 분다 모두가 숨죽인 오늘 밤 / 건물 사이 쫓기는 피하는 눈길들 /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버릴 수 없어 놓을 수 없어 / 바람보다 드세게 숨소리 내어본다 / 내어본다 숨소리”


-이소선합창단 창작곡 <바람보다 드세게> 中


합창단은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다. 바람 잘 날 없는 비정규직의 아픈 삶을 노래하고 ‘바람보다 드세게’ 숨소리를 내자며 이 시대의 ‘호모 사케르’들을 응원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고, 소외된 자들과 공존하고자 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바람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밥 딜런은 이 고통이 끝나는 시기를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빌려, 입 밖에 꺼내어본다. “친구여, 그건 바람(hope)만이 알고 있어. 바람만이 그 대답을 알고 있지.”


이은주씨는 노동 인권에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1월 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