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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홍석천, 그리고 레즈비언 (박꽃)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4:43
조회
412

박꽃/ 청년 칼럼니스트


고독사를 주제로 한 방송국 다큐멘터리 팀의 인턴으로 참여했던 지인은, 서울 종로 쪽방촌에서 만난 중년 게이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었다. 그는 홍석천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홍석천은 우리나라에 게이 담론을 대중화한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게 일반이 생각하는 그의 ‘가치’다. 한데 그와 똑같은 게이의 입장은 조금 다를 수 있다는 걸 그 때 처음 알았다. ‘성공한 게이’가 오히려 평범한(혹은 평범한 축에도 못 드는) 게이의 사회적 입지를 더 좁혀버린다고 했다. 중년 게이는 홍석천의 사회적 가치보다, 홍석천이 실질적으로 자기 삶에 미치는 문제들에 대해 더 민감한 감수성을 갖고 있었다.


홍석천은 외모, 경제력, 사회적 입지 등의 조건이 최상위에 속하는 극소수의 게이다. 매체는 성공한 그의 삶을 세련되고 멋지게 보이게 한다. 그럴수록 동성애자가 압도적 다수의 이성애자들 사이에서 번듯하게 설 자리를 마련하기 쉽기 때문이다. ‘비록 동성애자지만’ 여타 능력은 이성애자보다 뛰어나고 그래서 인정받을 만하다는 논리다. 문제는 그런 논리가 오히려 대다수의 평범한 게이를 소외시켜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이의 현실은 그렇게 성공적이거나 멋있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모든 이성애자가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듯 동성애자도 마찬가지다. 종로3가 쪽방촌에 거주하는 중년의 그는 게이라는 이유로 취업이 어려웠고, 결혼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성공한 게이라면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하다’는 단서를 다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불편하다. 본의 아니게 그에 일조하고 있는 홍석천의 존재도 조금 거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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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홍석천 인스타그램


비슷한 관점에서 박찬욱의 <아가씨>를 비판하는 시각이 있다. 영화 큐레이션 앱 '왓챠' 유저를 비롯, 일부 레즈비언들의 의견이 그렇다. 김민희와 김태리가 방울을 활용해 섹스하는 마지막 장면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두 여자의 ‘방울 섹스’는 그저 어여쁘게만 보이고 작위성이 심해 실제 레즈비언의 섹스와는 거리가 멀다는 게 요지다. 그 장면에서 김민희와 김태리의 두 몸은 무릎을 바닥에 댄 채 서로 마주보고 있다. 거의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몸의 곡선을 카메라가 직시하는 상태에서 그녀들은 동그란 방울을 활용해 서로를 만족시켜준다. 두 몸의 움직임이 너무나 비슷한 속도와 높낮이로 균질하게 움직인다. 미학적으로 아름다울지는 모르나, 비현실적이다. 일상적 섹스는 그렇게 불편한 자세로, 이질감이 심할 것 같은 도구를 활용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영화적 상상력 차원에서 존중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그런 만큼 그 장면이 남성이나 이성애자의 ‘레즈비언 판타지’를 만족시키는 데 불과하다는 비판적 의견 역시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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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가씨>의 숙희와 아가씨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아가씨>를 보며 불쾌해질 사람은 단연코 남성일 거란 추측을 한 적이 있다. 코우즈키(조진웅)는 두 여자에게 자신이 가장 아끼는 음란 서적을 훼손당하고, 백작(하정우)은 숙희에게 성기를 쥐어 잡혀 조롱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불편함을 느낀 이들은 오히려 레즈비언이었다. 현실감에서 비롯된 감수성 차이가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남자 배우가 영화에서 아무리 우스운 꼴을 당해도 현실에서 남성은 여성에게 어지간해서는 그런 식으로 모욕당하지 않는다. 때문에 하나의 영화에 불과한 남성모욕담을 잠시 즐기면 됐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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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가씨>의 백작과 코우즈키
사진 출처 - 다음 영화


본래 피해의식이나 자격지심이 없는 지점은 아무리 조롱당해도 별 타격이 없다. 그러나 레즈비언에게 이 영화는 아주 현실적으로 다가간다. 아름답게 섹스하는 레즈비언이 일종의 ‘단서’로 작용할 우려가 있기에 그렇다. 그렇게 아름다운 섹스라면, 대중에게 보이고 인정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식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그럴 때 레즈비언이 느끼는 불편함은 중년 게이가 홍석천을 보며 느낀 거북함과 비슷하다. 영화의 대중이자 공동체의 구성원인 이들에게 레즈비언의 삶이 미화됨으로써만 의미를 갖는다면? 별로 아름답지도, 성공하지도 않은 레즈비언의 삶과 사랑은 어떤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물론 영화가 현실을 똑같이 모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영화가 현실의 어떤 문제들을 생각하는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아가씨>는 본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김민희와 김태리만큼 아름답지 않은 평범한 레즈비언을 공론의 장에서 배제할 우려에 놓여있다. 발군의 게이 캐릭터 홍석천이 성공한 게이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때, 역설적으로 다수의 평범한 게이가 설 자리는 좁아지듯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가씨>의 방울 섹스 장면을 불편해하는,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이들의 마음을 좀 더 성의껏 이해해보려고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 동성애자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감수성이 한 차원 더 높아질 수 있다.


이 글은 2016년 8월 1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