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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상실의 시대 (지영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4:21
조회
283

지영의/ 청년 칼럼니스트


“그 애, 수능 전에 자살했어.” 한 통의 전화로, 연락이 안 되던 친구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통화에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스무 살의 봄, 나는 오랜 친구를 잃으며 20대를 맞이했다. 그녀는 대학 문턱을 넘기 위해 스스로에게 매겨지는 성적 등급을 올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1등급, 2등급 그리고 3등급. 성적이 점점 떨어질 때마다 그녀는 종종 자신이 못 먹는 고기가 되어간다고 농담 아닌 농담을 하곤 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능이 가까워 왔을 때, 자신이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미달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열아홉 살에 삶을 포기했다. 안타깝게 떠나간 어린 시절의 친구는 서서히 잊혀져갔다. 나에게 있어 그녀의 죽음은 나와 주변인들에게 한정된, ‘개인적인’ 비극이었다. 내가 또 다른 죽음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지난해 여름, 한 여성이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그녀는 부당한 해고를 당하고 수년간 투쟁해온 KTX의 여승무원 중 한 명이었다. 오랜 시간 눈물과 고통 속에 투쟁했으나, 그녀들은 끝내 코레일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패소했다. 법원의 판결이 약자에게 등을 돌린 순간, 코레일에 내야 하는 고액의 반환금은 가족이 함께 짊어져야 하는 빚이 되었고 여승무원들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그녀들의 마지막 소식을 전하는 기사의 제목은 ‘KTX 여승무원 투신자살’이었다. 그녀의 죽음 앞에서 오래전 친구의 죽음이 겹쳐졌다.


어린 시절의 내 친구는 모범생이었다. 학교와 학원, 독서실을 전전하는 하루의 끝에 친구와 통화하며 숨을 돌리는 짧은 시간조차 ‘낭비’라는 죄책감을 느끼던 그녀는.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오롯이 착한 학생이었던 그녀가 평가 제도의 압박에 지쳐 잠시 휘청거렸을 때, 사회의 입시 교육 제도에는 그녀를 위해 마련된 여지와 대안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안타깝게 삶을 마감하지 않고 성장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까? 아마도 여승무원이 마주한 현실을 그녀도 마주했을지 모른다. 성실히 근무한 끝에 부당한 처우를 마주하고, 그 부당함을 감내하지 않으면 해고를 당해야 하며, 사회 정의를 세우는 기관에 의해 벼랑으로 내몰리는 현실 말이다.


과연 그들의 죽음에 자살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그것은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 인간보다 힘이 강한 거대 자본의 사회와 그 사회를 위해 인간을 순위 매겨 평가하기 위한 제도는 필연적으로 비인간적 고통을 양산한다. 사회가 구조적 문제로 인해 생겨난 개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감내’를 강요하는 것이다. 구조의 문제로 인해 생기는 고통을 감내한 이들은 사회인, 그렇지 못한 이들은 해고자, 탈락자, 폭도로 내모는 것이다.


20160512web01.jpg사진 출처 - pixabay.com


여승무원과, 어린 학생. 그들은 견디기 어려운 사회에서 더 이상 걷지 못해 날아올랐다. 사회구조가 요구하는 대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서. 결국, 인간이 살지만 인간적이지 못한 사회 구조에 의한 타살이었다. 비인간적인 사회 구조로 인해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들의 죽음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느 날은 해고당한 가장이, 어느 날은 군대 사회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어린 군인이. 또 어느 날에는 어린 자식을 차디찬 바닷속에 낡은 배와 함께 묻어야 했던 부모가.


사람이 사는 사회에서 사람이 사회 구조로 인해 죽어가도, 사회는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다.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할 때마다 인간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사람과 함께 상실하고 있는 또 하나가 있다. 사회에서의 인간에 대한 의미다. 우리는 사람을 잃는 일에 점점 익숙해지고, 무뎌지고 있다. 무딤을 넘어 죽음을 조롱하고 피붙이를 잃은 유가족이 시체를 팔아 돈을 번다는 참혹한 말이 공감을 얻어내는 사회가 되었다. 이 속에서 하나의 죽음도, 수백의 죽음도 사회를 바꾸는 물음이, 외침이 되지 못하고, 그저 한해의 사망 통계 속의 숫자로만 기록되고 있다. 누군가 유족과 고인을 조롱하는 퍼포먼스를 해도 사회에 이를 저지할 기제가 없고, 정치권력은 사람의 죽음 앞에 쉽게 등 돌린다. 이는 우리 사회에 사람의 가치에 대한 내면적 합의가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도, 사람을 함부로 잃어선 안 된다는 것도 사회의 인식 속에서 흐려지고 있다. 사람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인식과 무엇이 옳다는 견고한 합의가 없으니 사회의 주체가 거꾸로 되어간다. 구조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구조가 사람 위에 군림하는 양상이다.


비인간적인 구조는 치밀하게 모습을 감추고, 문제를 축소한다. 문제의 원인을 일부로, 개인으로 돌리고 은폐와 축소, 대타를 통해 문제를 잠재우고 존속해 나가는 것이다. 제2의 세월호가 되어가고 있는 옥시 사태 또한 명백한 구조의 문제다.


비인간적 평가제도, 경제 구조에 지쳤으면 벼랑으로 밀려나지 않고 쉴 자리와 대안을 찾을 여지가 필요하고, 잘못된 구조로 인해 사람을 잃었으면 구조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구조를 향한 당신의 물음이, 외침이 절실하다. 전체의 일부가 아닌, 개인이 아닌, 구조를 향한 물음이. 사람을 잃는 것은 아프고, 막지 못한 것은 부끄러워야 한다. 우리가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없더라도, 더 이상의 상실을 막기 위해 물음을 던져라.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치지 않고 물음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왜 잃게 되었는가를.


지영의씨는 KTV 국민방송에서 인턴기자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글은 2016년 5월 1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