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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이보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4:00
조회
267

이보라/ 청년 칼럼니스트


700개의 공들이 날아다닌다. 투명하고 거대한 유리통 안에서 사방으로 튀겨진다. 각기 다른 색과 숫자를 지닌 공들 중 일부만이 통의 배출구로 빠져나올 수 있다. 제일 강하고 권력이 있어 보이는 누군가가 버튼을 누른다. 비슷비슷한 공들 중 몇 개만이 선택돼 배출구로 나온다. 나온 공의 개수는 단 5개. 숫자는 ‘100234’, ‘100321’, ‘100099’, '100021', '100697'. 복권이 추첨되는 장면일까. 아니다. 우리 회사의 공개채용 전형 모습이다.


현재 우리 회사에서 필요한 인원은 단 5명이다. 올 초 미리 인원을 충원하기도 했고 많은 인원은 필요하지 않아서다. 최근 ‘0명’을 뽑는다는 공채 공지를 보고 700명이 모였다. 이들은 자기소개서에 회사가 원하는 인간이 바로 ‘나’라고 썼다. 곧 치러질 면접 자리에선 자신만의 소신, 신념 따위는 주머니에 넣어둘 것이다. 인상이 좋아보이도록 이를 활짝 내보일지도 모른다. 이후 회사에서 가장 힘이 센 누군가가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버튼을 누를 것이다. 합격자 5명을 제외한 695명은 사회인이 될 수 있는 배출구로 빠져나오지 못한다. 복권에 당첨 되지 못한 얼굴을 할 것이다.


20151202web01.jpg사진 출처 - flicker


난 당첨자였다. 몇 달 전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물론 6개월 간 희망고문이 있었다. “몇 명 전환시켜줄지 모른다”, “정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두루뭉술한 말만을 믿고 열심히 일했다. 주말에도 쉬지 않고 발제 거리를 찾았으며, 취재를 위해 새벽 4시에 스쿠터에 올라 도로를 달린 적도 있다. 최종 면접에서 “인상이 어두워보인다”는 임원의 판단에 탈락할 뻔도 했지만 결국 나는 배출구행 공이 됐다.


하지만 배출구로 나오지 못한 인턴들도 있었다. 나와 거의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수준의 학교를 나와 비슷한 일을 하던 친구들이다. 이들은 정규직 전환 조건이 없는 전형으로 입사했다. 이 때문에 인턴으로 일하는 동시에 회사 공개채용 전형을 거쳐야 정규직이 된다. 700개의 공 중 5개가 돼야 한다. 그들은 나보다 더 오랫동안 유리통 안에 갇혀 숱한 부딪힘을 감내하고 있다. 한 인턴 친구가 회사 공채 면접을 앞둔 날, 이 시가 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중


이보라씨는 약자와 소수자에 관심을 갖고 머니투데이에서 인턴기자로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5년 12월 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