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우리시대

‘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제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는데요” (박서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5:29
조회
391

박서현/ 청년 칼럼니스트


교보문고를 돌아다니다 ‘소논문 작성법’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대학원생인 나는 이거다! 하는 마음에 잽싸게 집어 들었다. 그러나 집어든 책은 대학원생을 위한 책도, 대학생을 위한 책도 아니었다. 고등학생, 특히 학생부종합전형을 준비하는 입시전략도서였다. 책에는 선행연구 조사부터 논문 양식, 간단한 조사방법론 등 고등학생이 15-20페이지의 완성된 논문을 쓰기 위한 가이드라인이 담겨 있었다.


학생부종합전형은 최근 지속적으로 선발비율이 확대되어 크게 주목받고 있는 대입 수시 전형이다. 내신, 자기소개서, 학생기록부, 면접을 모두 반영하는데, 특징적인 것은 기존의 학생부교과전형과는 달리 학생기록부의 교과, 비교과 활동을 모두 반영한다. 다시 말해, 내신 성적뿐 아니라 자기소개서와 그 속에 담겨있는 스토리를 보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학생부종합전형은 금수저 전형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과거 입학사정관제처럼 일반 학생은 준비하기 어려운 화려한 스펙잔치로 이어지지 않겠냐는 우려였다. 최근까지 사실이기도 했다. 고등학생을 위한 소논문 작성법 도서를 비롯해 과외 및 대필까지 암암리에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20170124web01.jpg2016년 서울대학교 학생부종합전형 안내자료
사진 출처 - 구글


그러나 학생부종합전형은 입학사정관제와는 분명히 다르다. 학생부종합전형에서는 교외 활동을 일체 기록할 수 없다. 특히 사교육 개입 요인이 큰 교외 올림피아드 및 경시대회, 어학연수 등을 기록할 경우 불합격처리 된다. 기록할 수 있는 활동은 진로와 관련한 교내 대회, 동아리, 독서기록, 교내 연구 등 교내에서 이루어진 사항뿐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의 대표적 문제점으로 꼽히는 교사의 임의적 기재, 학생의 학생부 조작, 소논문 대필 가능성도 점차 축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에서는 작년 11월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개선 방안’을 통해 학생부 관리 기재 절차를 강화하고, 소논문을 교내 연구로 제한하는 등 사교육 개입을 배제하도록 지속적으로 수정·보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시와 수능은 일면 공정한 대입의 상징으로서 지금껏 선호되어 왔지만, 되돌아보면 이러한 입시구조가 교과 위주의 단순 주입식 교육과 사교육 과열, 수능 만능주의를 낳은 측면이 있다. 수능과 이를 위한 주입식 교육은 진로에 대한 고민과 자아 성찰을 시간 낭비나 현실도피로 받아들이게 했다. 수능은 “공부를 왜 해야 하죠?” 라는 학생들의 질문에 “좋은 대학에 가야 네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많기 때문이지”라고 답한다. “제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는데요. 여러 활동을 하면서 고민해 볼게요”라는 말에는 “네가 여러 활동을 할 시간에 친구들은 수능성적을 올리고 있을 거야”라는 핀잔으로 답한다. 때문에 단순 주입식 교육에 매진해온 나와 같은 세대들은 대학 입학 후 대부분 ‘제2의 사춘기’를 맞는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진로가 존재하고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묻는 중요한 질문을 우습게도 대학 전공을 이미 결정해버린 이후에 시작하는 것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이 확대되면 많은 학생들은 이러한 고민을 훨씬 더 일찍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유사한 기조로 최근 도입되고 있는 자유학기제, 창의적 체험활동과 결합되면 단순히 학교가 교과과정을 이수하는 기관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활동을 경험하고 진로를 탐구하는 공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까지 해본다.


소논문 작성법이라는 고등학생용 입시도서를 읽으며, 난 안쓰러움과 함께 부러운 감정이 들었다. 누군가에겐 이 소논문이 성적 맞춰 대학가고, 대학 맞춰 직장을 결정하고, 직장 맞춰 사는 삶이 아닌,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의 결정의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수능점수에 따라 혜택 받는 것이 공평하다는 신념(학벌주의)이 아닌, 개인의 자율성과 선택을 존중하는 사회로 가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 많은 문제점들이 있고, 계속해서 보완해나가야 하지만 관심 있게 지켜봐 주자. “제가 뭘 원하는지 모르겠는데요”라는 말에 학생부종합전형은 “그럼 학교에서 같이 찾아보자”라고 대답해주지 않을까.


박서현씨는 노동과 정치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


이 글은 2017년 1월 25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