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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의 ‘프로불편러’ (이은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4:39
조회
411

이은주/ 청년 칼럼니스트



“언니들, 이거 나만 불편해?”

한 여성 커뮤니티에서 등장한 이 말은 ‘여교사’, ‘처녀작’처럼 여성차별적인 현상이나 언어에 불편함을 표할 때 자주 쓰이면서 하나의 유행어가 되었다. 이 유행어에 설명서처럼 따라오는 단어가 ‘프로불편러’다. ‘프로불편러(Pro+불편+-er)’라는 용어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프로처럼 불편함을 토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요즘은 여성차별을 조장하는 글과 상관없는 유머글이나 일상글에도 “언냐(‘언니야’를 줄여 말하는 것으로, 여성 특유의 말투를 묘사한 것)들, 이거 나만 불편해?”라는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여성 커뮤니티 유저들이 사소한 것에도 ‘불편함’을 제기해서 논란거리를 만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인 글에도 위와 같은 댓글을 달며 ‘프로불편러’라고 불리는 일부 여성들을 되레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 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는 아예 프로불편러를 희화화한 코너를 내보내서 논란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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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프로그램 <SNL>에는 일명 ‘프로불편러’를 조롱하는 듯한 방송을 해 논란을 낳았다.
사진 출처 - tvN



프로불편러는 본래 남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회문제를 날카롭게 포착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이다. 은폐되어 있거나, 혹은 대부분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불편함’을 표현할 수 있는 특유의 예민한 DNA를 그들은 가지고 있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예민함은 기성제도와 반대 노선을 걷는 것이므로 사회에서는 늘 소수이자, 비주류이다. 만약 이 소수의 프로불편러가 ‘불편함’을 표현하면, 다수는 이에 대해 불편해하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다수는 그들이 믿고 있던 세계의 질서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소수가 다수의 이익을 침해한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기도 하다.

그 이유로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외치는 프로불편러의 ‘소수의견’이 사회적 각성을 일으키기 보다는, 다수가 ‘피곤하다’고 말하며 오히려 그들을 불편한 대상으로 보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은 남들과 다른 의견을 가지는 ‘불편함’을 일단 불편해하고 보는 사회적 분위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흔히 쓰이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라는 말은 무언가에 의문을 갖거나 문제를 지적하기보다 ‘다수의 의견에 묻어가라’는, 암묵적으로 동의된 사회적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길 바라는’ 사회에서 그 틈을 비집고 나오는 프로불편러의 존재가 다수의 눈총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이것이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소수자’가 불편함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다수자’가 불편해하는 소통구조 하에서, 다수는 소수의 입을 막는다. 프로불편러의 정당한 문제제기가 그저 ‘유난스러움’으로 격하되고 그 과정에서 소수자에 대한 잔학한 폭력이 수반된 것은 수많은 역사적 사실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해 미국 노동자들이 일으킨 ‘메이데이 운동’을 들 수 있다. 그 당시 이들은 “기계를 멈추자!”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1880년대 후반, 밤낮없이 기계가 돌아가던 공장에서 기계만도 못한 삶을 살던 노동자들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최소 노동시간 8시간의 인간다운 삶을 살자고 나선 것이었다. 당시 너나 할 거 없이 공장을 세우고 노동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당연시 여기던 자본가와 기득권층은 그들을 재억압하기 위해 ‘피의 숙청’을 감행했다. 즉, 소수의 프로불편러가 억압에 대한 저항을 하면 다수가 그들에게 재억압을 가하는 식이다. 이러한 억압과 폭력의 악순환은 프로불편러의 입을 막는 행위가 되고, 사회의 유익한 담론을 만들어 내는 기회를 박탈해버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다수의 억압에 저항하는 소수의 프로불편러에 의해서 변화되어왔다. 만약 역사 속에 프로불편러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껏 세계사에서 있어왔던 수많은 인식의 전복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 이단으로 몰리고, 화형을 당하는 등 억압과 재억압을 감수하며 ‘불편함’을 알리려고 했던 코페르니쿠스와 제자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들은 아직도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고 있을 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미국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운동을 계기로 전 세계에 공감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현재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8시간 노동’은 꿈의 노동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짐작하지 못했을 뿐, 프로불편러는 일상 속에 늘 존재해왔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혹은 침묵하는 보편적 사실에 돌을 던지고야 마는, 그런 ‘일침러’들 말이다. 비단 ‘김여사’나 ‘~~녀’ 담론에 반대하며 “언니들, 이거 나만 불편해?”를 외치는 페미니스트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차별금지를 주장하는 성소수자와 장애인, 부당해고와 임금삭감에 저항하는 노동조합, 위안부 소녀상 철거를 반대하는 시민단체 등 일상 속의 프로불편러가 다양한 사회 군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프로불편러는 이 사회에 ‘메이데이’같은 존재이다. 그들은 다수가 막연하게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다수의 ‘애매함’을 파고드는 소수의 ‘구체적’ 지적은 결국 사회구성원들이 ‘나는 왜?’ 나아가 ‘우리사회는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회 발전에 유익한 담론을 공론장으로 이끌어낸다. 편향된 하나의 가치가 굳어지는 사회에 구조 요청을 보내는 ‘메이데이’를 통해 그들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적어도 이들의 ‘메이데이’ 외침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릇이 크다’라는 말은 아량이 넓은 사람을 이를 때 쓰는 말이다. 우리 사회에 ‘큰 그릇’보다 필요한 것은 ‘빈 그릇’이다. 제 아무리 ‘큰 그릇’이라도 하나의 생각만 담다보면 넘쳐흐르기 마련이다. ‘빈 그릇’은 ‘무엇이든 담을 준비가 되어있다’라는 일종의 사회적 배려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나와 다른 ‘소수의견’이라도 부드럽게 받아들이는 관용이, 소수의 불편을 품어낼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은주씨는 노동 인권에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