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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사람이 있는 곳이 자리 (김시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5:44
조회
518

김시형/ 회원 칼럼니스트


30대 중반이 넘어서 20대와 함께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나는 내가 행운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더욱이 내가 주로 있는 자리는 여학교의 학교도서관이다. 여성 혐오 발언이 난무하는 요즘 이 또한 행운인지도 모른다.


20대 내내 돈을 못 벌면 죽는다는 공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30대 초반에 겨우 자리가 생겨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내 자리는 오직 업무를 위해서 존재했다.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새로운 탐색이 시작되었다.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로서 살아갈 수 없는 자리에서 벗어나 학교로 다시 돌아가는 게 어떨까. 이러한 바람으로 학교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 학교생활은 20대와는 달라졌다. 우선 내가 어떤 자리에 있는지 굳이 집착하지 않는다. 내가 원하는 자리는 이런 눈에 보이는 자리가 아니다. 그래서 학교도서관에서도 선호하는 자리가 있으면 앉고 없으면 다른 자리에 앉는다.


점점 깨닫게 되는 것은 20대가 놓인 각박한 경쟁상황이 예나 지금이나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비인간적인 경쟁을 하도록 부추기는 현실을 경험했다. 그 날은 사람들이 별로 없는 일요일 오전이었다. 30대 학생 한 명이 먼저 좌석발급기에서 자리를 발급받아 앉아 있었다. 그런데 늦게 온 20대 학생이 그 옆자리에 바싹 붙어 앉았다. 30대는 20대에게 좌석을 발급 받을 때 먼저 온 사람 바로 옆 자리에 앉지 말아달라고 말한 것 같다. 그런데 그 20대는 “전 좌석발급기로 자리 발급 받았는데요”라고 말했다. 이 대답에 기가 막힌, 30대 학생은 “사람이 공부를 잘하면 뭐해. 먼저 인간이 되어야지!”라고 말하면서 내 옆옆 자리로 옮겼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처음에는 그 20대 학생의 인성에 의문을 가졌었다. 그런데, 나도 학교도서관에서 종종 내가 먼저 앉아있는 데도 늦게 와서 내 옆에 바싹 앉는 여러 20대 학생들을 목격했다. 시험 때라 학교도서관에 사람이 많으면 옆에 바싹 붙어 앉는 것을 이해하겠다. 이럴 때에는 ‘한 사람당 한 자리’라는 기본 원칙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휴일에 도서관에 나와서 옆 사람을 무시하고 자기가 앉고 싶은 자리에 무턱대고 앉는 학생들을 만날 때,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그 다툼도 눈여겨보게 된 것 같다.


20170619web01.jpg학교 도서관의 매점 자리
사진 출처 - 필자


무엇이 내 연령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20대 학생들의 심리를 조장하고 있는지 그 배경이 마침 궁금했다. 그리고 이 배경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나는 많은 이유 중에서 지나친 경쟁을 조장하는 사회분위기가 이와 같이 자기 자신만 챙기기 급급한 20대를 낳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고 싶다. 이런 분위기라면 좌석발급기는 먼저 온 사람을 배려해서 자신의 자리를 결정하는 기계가 아닌, 늦게 오더라도 먼저 자리 잡은 사람에 대한 고려 없이 오로지 자기가 앉고 싶은 자리를 결정할 수 있는 기계가 되어버린다. 다시 말해서, 이기적인 사람이 기계를 이용해서 대다수 사람의 편리를 해치는, 효율적인 근거로 사용될 수 있겠구나 싶다.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좌석발급기로 발급받았어요.”


생기발랄한 20대를 기대했다가 뜻하지 않은 광경에 슬프기 시작했는데, 어느 새 시간이 흘러서 학교에 시험 때가 다가왔다. 학교도서관은 터질 듯이 사람이 많아지고 당연히 매점에도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밥 먹을 자리도 없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식사를 할까’하며 자리를 찾다가 4명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비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운이 좋았다. 사람이 꽉 들어찬 매점에서 혼자서 4명 테이블에 앉기가 불편했다. 일단 나도 식사를 해야 하니 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1인 테이블에 자리가 생겼는데, 3명의 학생이 그 1인석이라도 잡자는 식으로 빠르게 그 자리를 잡았다. 나는 원래 소심한 성격이라서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잘 건네지 못한다. 나이가 낯짝을 두껍게 만드는 경향이 있는지, 그 20대 학생들 3명에게 조심히 말을 건넸다. “우리 자리 바꿀까요?” 그러자 그 20대 학생들의 반응이 어찌나 감사해 하는지, 일제히 “정말 감사합니다”라며 인사를 깍듯이 한다.


몇 달 전일로 20대 학생들의 인성을 걱정하다가 뜻밖의 감사인사로 이 걱정이 쓸데없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이었다. 자리 바꾼 것이 감사 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매점에도 좌석발급기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난 20대 학생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미덕을 체험하는 기회는 고사하고 매사에 기계에 근거하여 사고하는 비인간적인 삶의 태도를 또 한 번 몸에 익혀야 했을 것이다.


김시형 : “생명윤리의 한 분야인 ‘인간대상 연구 윤리’를 성찰하고 있는 연구원”


이 글은 2017년 6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