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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이거나 킬링이거나 (이빛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4:40
조회
314

- 제주에서 한 달 살기


이빛나/ 청년 칼럼니스트


제주도에서 6월 한 달을 보냈다. 명분은 힐링이 필요해. 쉬지 않고 뭔가를 해야 하는 도시의 삶을 잠시 내려놓고 싶었다. 요즘 유행한다는 일명 '제주도 한 달 살기'에 도전했다. 백수만이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제대로 누리고 왔다.


시간적으로는 자유인이지만 금전적으로는 노예 상태였으므로 바다 앞 럭셔리 펜션에서 지낼 수는 없었다. 차선책은 게스트 하우스 스탭, 일명 종업원이었다. 게스트 하우스마다 조금씩 여건이 다르지만 보통 한 달에 보름 정도만 일하고 남은 날들은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숙식을 제공받을 수 있다. 일하는 날도 방 청소가 끝나면 체크인을 시작하는 오후 4시까지는 자유다.


일단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숙식제공을 빌미로 노동력을 착취한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긴 했다. 하지만 취업준비에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벗어두고 싶었다. 일하는 날이면 게스트 하우스가 위치한 제주시 근방을 돌고, 쉬는 날에는 멀리 서귀포시까지 나갔다.


나는 할머니란 별명이 있을 정도로 아침잠이 없다. 새벽부터 일어나 슬금슬금 청소를 시작한다. 퇴실하는 손님 순서로 청소를 하다보면 늦어도 정오에는 일이 끝난다. 오늘의 목적지를 정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바닷가 근처의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기를 반복하고, 인적이 드문 돌담길을 바다가 보일 때까지 걸었다.


테마는 ‘카페 탐방’이었다. 나는 커피 없인 하루도 못사는 카페인중독자다. 커피 맛이 유명하거나 특색 있는 메뉴를 판매하는 카페는 여행지에서 빠뜨릴 수 없다. 사실 일부러 계획할 것도 없었다. 바다가 가까운 곳부터 제주 시내까지 홍대 근처에 있을 법한 ‘힙’한 카페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힙하다’는 말을 듣고 특정 신체부위를 떠올릴 지도 모르지만, 이건 엉덩이와 다리 사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트렌디하다는 뜻이다.) 카페 덕분에 해변까지 유명해진 경우도 있다. 세화해변은 해변가에 위치한 ‘카페 공작소’와 함께 유명세를 탔다. 세화리에 가면 해변가보다 카페 공작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위해 몰려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카페뿐만 아니라 음식점, 개인이나 소규모 단체가 펴내는 독립출판물을 판매하는 책방 등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제주댁 이효리를 시작으로 제주도는 힙스터들의 유토피아가 된 듯하다. 힙스터는 단순히 유행에 민감한 것을 넘어 주류 문화보다 독립문화적 가치를 쫓는 사람들을 말한다. (뭔지 감이 잘 안온다면 당신은 힙스터가 아니다.) 이런 힙한 사람들, 자연과 더불어 여유로운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여행을 오고, 작업실을 차리고, 아예 자리를 잡는다.


제주도의 새로운 풍경으로 자리잡아가는 문화공간들은 자연스럽다. 제주도 특유의 푸르른 풍경과 젊은 감성의 조합은 제주를 찾는 또 다른 이유가 되고 있으니. 전통적으로 유명한 관광명소들은 가족여행객과 중국인들이 가득하다면, 제주를 찾는 젊은이들이 꼭 들르는 곳은 ‘인생 프사(프로필 사진)’를 남길 수 있는 공간들이다. 카메라만 가져다 대면 각이 나온다. 카페 안에 가득한 사람들을 피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20160718web01.jpg사진 출처 - 필자


하지만 한층 힙해진 제주도를 마냥 환영하기에는 씁쓸한 맛이 있다. 내 머릿속에는 죽어있던 도심 곳곳을 새롭게 바꿔놓자마자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밀려나는 젊은 예술가들의 뒷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제대로 힙한 멋쟁이들이 값이 싼 지역으로 들어와 낡은 동네의 분위기를 바꿔놓으면, 임대료가 치솟아 다른 곳을 찾아 떠나야 하는 역설을 말한다.


소위 육지인들에게는 힙스터의 파라다이스, 힐링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제주도민들에게 제주도는 삶의 현장이다. 제주살이의 에메랄드빛 환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제주도가 고향인 대학 친구를 만났다. 서울이 아닌 제주에서 만나 느낌이 다르다며 깔깔댔다. 힐링하러 왔다는 나의 말에 친구는 너도 참 대단하다며 추켜세웠다. “제주도 너무 좋다! 서울에 있으면 고향 생각나겠다. 이 좋은 제주도를 어떻게 떠나왔어?” 내가 물었다. “여기서는 미래가 안 보여서.” 친구의 대답에 ‘힐링’ 운운한 것이 미안해졌다.


지난해 한 취업포털 조사 결과 전체 채용공고의 40.9%가 서울에 집중돼 있었다. 경기도까지 합치면 수도권에 일자리의 반이 넘는 65.6%가 몰려있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통계들 중 취준생인 내 뇌리에 박힌 숫자다. 제주 지역 일자리는 0.4%로 전국 최하위였다. 그나마 생기는 일자리도 육지에서, 중국에서 건너온 사장님들에게 제주도 청년들이 고용된다.


그게 뭐가 나쁘냐고 물을 수도 있다. 일자리를 얻고, 성실하게 일하다 보면 종업원도 멋들어진 바닷가 카페를 차릴 수도 있을 것이다. 외부에서 몰려든 자본으로 몇 년 새 뻥튀기 된 땅값을 감당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빛나씨는 청년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학교 학보사에서 편집장으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


이 글은 2016년 7월 20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