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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택배는? (김시형)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12-20 17:10
조회
1389

김시형/ 회원 칼럼니스트


 택배가 사라졌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아무리 택배 물류량이 많은 추석 연휴에 배송시켰다하더라도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나? 결국 추석 연휴 코앞에 도착했다는 그 택배는, 도착했다는 메시지만 남긴 채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그것은 책이었다. 옛말에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하지만, 누군가가 내 책을 가져갔다는 의심이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동안 한 주에 1~2건씩 택배로 책을 받아보면서 한 번도 이런 일은 없었다. 문자메시지로 ‘몇 시 경에 택배가 도착할 예정입니다’만 남긴 채 그 후 아무 소식이 없다. 기다림 끝에 약 3주가 지나서야 택배기사님께 택배가 사라졌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런데 대뜸 무인택배함이 아니라 바닥에 두고 가셨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하실까?


 인권연대에 칼럼을 쓰기 전에, 아니면 인권 교육을 받기 전에 택배아저씨의 행동에 화가 났을 법 했다. 잠시 화가 나긴 했다. 그래서 택배 회사에 불편 신고를 하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소식은 없다. 항상 익숙하게 받아오던 택배가 사라지면서 그제서야 기숙사에서 택배들이 어떻게 관리되는지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기숙사의 택배실은 ‘무인’으로 운영한다. 택배가 오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택배 예상 도착 시간이 문자로 전송된다. 그럼 직장에 있는 나는 문자를 보고서 언제쯤 택배가 도착할지 가늠한다. 그리고 또 문자가 온다. 택배가 도착하면 무인택배함에서 물건을 찾을 수 있는 ‘비밀번호’도 문자로 전송된다. 바로 이 비밀번호 메시지를 받아야 정말로 택배가 도착한 것이다. 하필 그날 택배 기사님은 무인택배함이 아닌 바닥에 두고 가셨다. 택배는 바닥에 방치된 채로 긴긴 추석연휴가 지나갔다. 나는 ‘비밀번호’ 메시지가 언제 오는지만 기다리고 있었다.


 왜 택배 기사님이 바닥에 두고 가셨지? 문자 메시지만 하염없이 기다리던 나는 결국 그 기다리는 시간(약 3주) 동안 방치된 택배를 누군가 그냥 가져갔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택배를 찾으러 여러 번 무인 택배실에 다녀오면서 느낀 사실은 무인 택배함은 택배를 받는 학생과 택배를 관리해야 하는 기숙사만 좋을 뿐 정작 모든 노동력은 택배 기사님의 몫으로 떠넘기는 구조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많은 택배를 일일이 무인택배함에 입력하여 넣는 수고를 하고 계셨다.


 속상한 일을 오래 기억할 필요가 없어서 한동안 잊고 있었다. 그런데 나 같은 문제를 겪는 학생들이 한 둘이 아닌 모양이다. 어느 날 기숙사에서 택배를 관리하는 담당자 업무를 맡을 학생들을 모집했다. 그리고 무인 택배실 앞에 사진과 같은 메모판이 생겼다. 참 오랜만에 보는 손글씨들이다. 처음에 무인 택배실을 봤을 때, 세상에 이런 택배실도 있다면서 감탄을 마지않았다.



<무인 택배실> 입구에 마련 된 메모판
사진 출처 - 필자


 과연 무인시스템 도입이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것일까? 이제는 하루종일 ‘인간’을 만나지 않고도 스마트폰 하나로 무슨 일이든 해결할 수 있는 것만 같다. 4차 산업 혁명 시대 첨단 디지털 시스템들이 생활 속에 도입되는 와중에 뜻하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문득 생겨난 손글씨 메모판을 보면서 첨단 무인시스템 속에서도 꼼지락 거리며 살아있는 인간의 향기를 느끼는 것 같아 안도한다. 그나저나, 어디로 갔을까 나의 택배는!


김시형 : “생명윤리의 한 분야인 ‘인간대상 연구 윤리’를 성찰하고 있는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