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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니즘’에서 ‘함께사니즘’으로 (이은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5:11
조회
619

이은주/ 청년 칼럼니스트


“죽기 직전에 못 먹은 밥이 생각나겠는가? 아니면 못 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


웹툰 <무한동력>의 명대사로 꼽히는 이 말은, 꿈을 잃고 방황하는 청춘들에게 용기를 주는 메시지로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그런데 최근 강연에서 만난 주호민 작가는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8년이 지난 지금, 그는 ‘밥’을 선택하겠노라고 말한다. 밥을 먹어야 꿈도 꿀 수 있지 않겠냐는 거다. <짬>이라는 만화를 연재할 당시만 해도 땡전 한 푼 수입 없이 일하면서도 그림 그리는 것이 즐거워 만화를 그려왔던 그다. 그가 ‘꿈보다 밥’이라고 생각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세상이 너무 변해서’다. 경기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생활고로 인한 자살뉴스는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가 먼저다, 일명 ‘먹고사니즘’은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이라고 한다. 90년대 후반 IMF 금융위기 이후 경제염려증과 함께, 경쟁과 성장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구호로 자리해왔다. ‘먹고사니즘’은 한 개인이 자본주의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톱니바퀴의 톱니로 살아가게 한다. 안정성이 보장되는 공무원이 어느새 최고의 꿈이 되어버린 중고생, 바늘구멍보다 좁다는 취업문을 뚫기 위해 1분을 아끼려고 컵라면으로 밥을 때우는 청년층, 희망퇴직과 권고사직을 피하기 위해 책상을 잡고 버티는 기성세대, 또 ‘절대적 빈곤’상태에 놓여있는 노년층까지. 이렇게 보면 우리 사회 톱니들에게는 ‘생계형’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을 수가 없다. 꿈을 좇는 ‘낭만’이 있었던 8년 전, 주호민 작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을 거다. ‘못 이룬 꿈보다는 당장 못 먹는 밥이 피부에 와 닿는다’는 지금의 그의 말을 미루어보면, ‘먹고사니즘’을 무작정 개인의 윤리적 문제로 비판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사실 ‘먹고사니즘’은 개인의 생존만을 1순위로 생각하는 탓에 정작 공동체가 먹고 사는 문제는 도외시한다는 치명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다. ‘먹고사니즘’의 연관검색어는 곧 ‘각자도생’, ‘적자생존’이기 때문이다. 이 ‘먹고사니즘’이 집단적으로 발현되면 그 효과는 ‘정치적 무관심’으로 나타난다. ‘먹고사니즘’을 신봉하는 시민들은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일에는 침묵하는가 하면, 자신의 밥그릇에 불이익이 될 것을 염려해 사회문제에 의문을 갖거나 비판을 가하는 행위 자체를 삼간다. “내 일이 아니면 상관없어.” 잘게 쪼개져 분자화된 개인들은 밥을 먹고 필요한 것을 사는 본능적 행위에 몰두한 나머지, 이 원초적 본능에 중독된 나머지 사회적 아젠다에는 관심을 쏟을 생각을 하지 못한다. ‘먹고사니즘’으로 인한 밥벌이의 애환은 개별적 감정일 뿐, 내 일이 아니라면 노동과 복지문제를 비롯한 사회문제에는 나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치 자체를 적대시하는 태도나 분위기가 어느 새부터 우리 사회에 만연해졌다.


먹고사는 문제를 챙기는 것은, 따지고 보면 개인 윤리의 문제이기 전에 체제가 낳은 괴물이다. 하지만 ‘생존’과 ‘안정’이라는 가치를 주입시키는 이 ‘먹고사니즘’ 신화는 올해 하반기를 기점으로 균열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먹고살기 위해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온 수많은 개인적 주체들이 정치적 행위자로서 변태(變態)하게 된 것은, 이번 사태에서 시민들이 느낀 ‘자괴감’과 무관하지 않다. 올해 하반기 봇물처럼 터진 국정농단 사태는 이 사회가 노오력과 안간힘이 전혀 통하지 않는, 철저히 기득권층 위주로 돌아가는 전근대적 계급사회였다는 것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노력한 만큼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사회, 그럼에도 치열하게 살라며 ‘먹고사니즘’을 권하는 사회…. 헬‘조선’의 백성 개개인의 ‘먹고사니즘’ 꿈을 꺾어버린 작금의 사태는 한 나라의 왕과 간신, 그리고 수많은 부역자들이 법률을 유린하고 나랏돈을 횡령한 결과였다. 이는 곧 백성들이 체제의 순응자가 아닌, 체제를 허물 수 있는 정치적 참여 주체로 이행되는 과정이었다. 하루하루 밥벌이의 고됨을 견디어 왔던 2016년 대한민국의 민주 시민들은 이제 ‘먹고사니즘’을 내던지고 횃불보다 더 오래 가는 ‘LED 촛불’을 들고 거리로,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한 목소리로 외쳤다. ‘함께 살자’고.


20170103web01.jpg사진 출처 - ytn


‘먹고사니즘’의 반대말은 무엇이었을까. 그동안 ‘먹고사니즘’과 ‘함께사니즘’은 서로의 반대편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먹고사니즘’ 시대에서는 밥그릇이 곧 책임이다. 가장의 책임, 노동자의 책임, 취준생의 책임, 수험생의 책임…. 하지만 대부분 개별적 책임에 머물러있는 탓에 ‘나만 아니면 돼’라는 이기적 유전자가 작동하곤 했다. 두 달여간 이어진 촛불집회는 이 개개인이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뜻이다. 지금껏 900만 명에 달하는 전국의 시민들은 촛불과 함께 갖가지의 책임을 들고 나왔다. ‘1번 당’과 ‘그 분’의 열성지지자인 60대는 자식세대에게 미안함을 토로했고, 20대 청년은 ‘먹고사니즘’에 눈이 멀어 정치적으로 무관심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자괴감과 미안함, 책임감으로 똘똘 뭉친 시민들의 목소리는 ‘이게 나라냐’라는 고함으로 울려퍼졌다. 결국, ‘함께사니즘’은 ‘먹고사니즘’의 반대말이 아니라 확장형이었다.


며칠 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가족,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한 잔하며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다. “XX야, 진실을 밝히고 이 나라가 조금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엄마가 떳떳한 엄마가 되었을 때, 그 때 널 그리워하고 슬퍼할게. 미안해….” 2014년 4월 16일, 자식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세월호 희생자의 어머니는 지금 나라를 규탄하는 촛불들이 뒤덮기 훨씬 전부터 광화문 광장을 지키고 있었다. 삶의 주체였던 평범한 사람들은 죽임에 맞서며 정치적 주체가 되었다. 마찬가지다. 이들이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듯, 정치적 주체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혹은 몇 십 년 후 누군가에게 떳떳해지기 위한 책임감이 광장으로 나오도록 그들의 발을 이끌었다. 광화문의 촛불은 이제 파란 지붕 아래 ‘그 분’을 끌어내리기 위해서만 타오르는 것이 아니다. ‘성과연봉제 폐지하라’, ‘노동개악 저지하라’, ‘세월호를 인양하라’, ‘사드배치 반대’ 구호는 피해자들의 것만이 아니다. 지금 광장에서는 모두가 ‘먹고사는’ 숭고한 문제를 불러내고 있다.


역사(史)는 사람(人)과 입(口)이 합쳐진 문자와 같다. 사람이 입으로 하는 것 중 먹고 살기 위한 가장 본능적 행위는 역시 밥을 먹는 것이다. 즉 역사는, 사람이 밥을 제대로 먹기 위해 투쟁해온 과정이다. 2016년의 겨울, 우리는 이미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어느새 연말이 다가왔다. ‘함께사니즘’의 온기는 한동안 식지 않을 전망이다. 앞으로도 광화문 광장에는 동그란 밥알 같은 촛불들이 붉은 불빛을 내며 알알이 박혀있을 것이다. 이제, 그 촛불들의 따뜻한 온기로 ‘함께 먹는 밥’을 지을 차례다.


이은주씨는 노동 인권에 관심을 갖고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7년 1월 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