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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학교 폭파 버튼 (조예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8-18 17:30
조회
631

조예진/ 회원 칼럼니스트



 학교 일의 상당수는 글을 읽는 것이다. 교육청에서 온 공문을 읽는다. 공문 작성 전에 작년 공문을 참고삼아 열어 읽는다. 늘 쌓이는 업무용 메신저의 글을 읽는다. 잘못 전하면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하기 때문에 특히 반 아이들에게 전해야 하는 내용은 꼼꼼히 읽는다. 교장, 교감님이 가끔 보내오는 글은 의도를 추리하며 잘 읽는다.

학생들의 글도 많이 읽는다. 지필평가에 포함된 서술형 답은 단답식에 가까워 읽기 쉽다. 논술형 수행평가처럼 자신의 생각을 담은 긴 글은 시간을 들여 읽는다. 요즘은 교내 대회가 많다. 대학 입시에서 교내 수상 실적이 중요하기 때문에 1년에 열리는 교내 대회가 100개를 넘기도 한다. 올해 내가 맡은 교내 대회는 5개이다. 참가자는 보통 100명에서 250명가량이니 보고서나 논설문, 시, 산문 등을 끊임없이 읽는다. 애들 글을 읽다가 1년이 가는 것 같다.

학생들의 글을 읽기 전에는 믹스 커피를 한 잔 마셔 정신을 깨운다. 공강 시간을 두 시간 정도 확보하거나 야근을 한다. 논제와 채점 요소가 정해져 있으니 비슷비슷한 글이다. 평가의 대상이니 3번씩 읽는다. 꼼꼼하고 딱 부러지는 아이인줄 알았더니 의외로 헐렁한 논리를 전개하기도 하고, 수업 시간에 입 한 번 뻥긋 안하는 아이인데 글의 구석구석에 생동감이 넘쳐 나기도 한다. 아이들의 글을 통해 일부이지만 그들의 생각을 엿본다. 하지만 평가나 수상을 위한 글은 포장이 잘 되어 있고 큰 재미는 없다.


20170816web01.jpg사진 출처 - 필자



 오히려 아이들의 발랄한 생각을 잘 알 수 있는 곳이 있다. 복도의 게시판이다. 작년 학교 예산의 일부를 사용하여 커다란 화이트보드 세 개를 복도에 설치하였다. 학교 일정도 써놓고 대회나 행사를 알릴 용도로 쓸 계획이었다. 4년 째 같은 학년을 맡고 있는 내가 복도 게시판을 관리하겠다고 자청했고, 하나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자유게시판이라고 알렸다.

화이트보드가 가장 활발히 사용된 시기는 국정 농단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작년 가을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게시판에 표현하였다. 크고 작은 대자보가 붙기도 하였다. 바쁜 3학년 수험생들도 내려와 한 줄 쓰고 돌아갔다. 가득 차면 또 쓸 수 있게 한 번씩 지웠다. 곧 가득 찼다. 게시판에 남겨진 아이들의 생각을 읽으며 나름의 재미를 느꼈다. 정부 비판을 위해 내가 게시판을 만들었다는 엉뚱한 소문도 났다. 억울했다.

해가 바뀌고 나서도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게시판에 왔다 간다. 시험 기간 같이 스트레스가 큰 시기에는 무서운 내용도 많다. 최근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학교 폭파 버튼’이었다. 누르면 학교가 폭파될까? 재미있어서 지우지 않았는데 누군가 지워버렸다. 아깝다.

 

조예진 :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역사는 좋아하지만 수능 필수 한국사는 싫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