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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열심히 안 하고 싶다 (이빛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4:52
조회
336

이빛나/ 청년 칼럼니스트



간만에 동향 친구 A를 만났다. 고등학교에서 서울로 대학을 온 몇 안 되는 귀한 친구다. 이공계 학과를 나온 A도 요즘 취직 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신촌에서 만난 A는 나처럼 커다란 백팩을 메고 있었다. 가방 속엔 둘 다 노트북이 들어있다. 하반기 공채가 시작된 탓이다. ‘오랜만에 수다 떨자’던 만남의 목적은 어느새 ‘자소서(자기소개서) 돌려보기’로 바뀌었다. 카페에 나란히 앉아 노트북을 펼쳤다. 요즘엔 공대도 취직이 쉽지 않다더니, A도 ‘자소서 쓰기-자소서 쓰기-필기시험-자소서 쓰기-면접’의 굴레에 묶여 있었다.

친구는 ‘문과보다 이과가 취업하기 좋지 않냐’는 말에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문과 나온 친구들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일지 몰라도 대기업이나 공기업이 아니면 이거밖에 못 했냐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이과 쪽 일자리도 줄어들고 있는 것은 똑같은 데 남들이 알아주는 곳에 가야한다는 압박이 크단다. 그러다보니 정작 어떤 직무를 하고 싶은 지는 뒷전이 된다고 한탄했다. 스스로를 잘 팔리는 상품인 것처럼, 어디에나 맞출 수 있는 만능 제품인 것처럼 고군분투해야하는 건 문과나 이과나 매한가지다. 우리는 한참 자판을 두드리다가 헤어졌다. 격려 인사도 잊지 않았다.

“공부 열심히 해! 시험 잘 보자!”
‘오늘 아침: 바나나랑 요거트’

‘오오.. 잘 지켰네! 나는 삼김(삼각김밥)이랑 하루견과 ㅠ 망함’

대학친구 셋이 모인 단체 카톡방이다. 우리는 365일 다이어트 중이다. 취직시험 공부를 하다 보니 살이 쪘다. 아침‧점심은 편의점 음식이나 빵으로 때우기 일쑤고, 저녁에는 야식으로 스트레스를 푸니 당연한 결과다. 그런데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면접에 가면 외모가 중요하단다. 아니, 실상은 같은 값이 아니라도 다홍치마다. 면접관들의 기준을 알 수가 없으니 외모 지상주의라고 욕하기도 뭐하지만, 합격자들을 보면 죄다 예쁘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어 했던 친구 B는 3년 만에 꿈을 접었다. B가 발표를 하면 넓은 강의실 끝에 앉아 있어도 귀에 쏙쏙 들어왔다. 전달력 있는 목소리가 B의 무기였다.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필수 코스라는 아카데미에서는 친구에게 더 마른 몸과 더 예쁜 얼굴을 요구했다. 다이어트와 성형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의실에 친구의 전신사진을 띄워놓고 외모지적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B는 충분히 예뻤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끊임없는 비교와 반복되는 탈락이 B를 작아지게 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며 아나운서를 포기했다.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외모 지상주의’를 탓하며 분노한다. 아나운서처럼 얼굴이 알려지는 직업이 아니고도 외모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일화는 차고 넘친다. 이건 어딘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며, 공부하는 것도 힘든데 먹는 것까지 줄여야 하냐며 욕하다가도, 내일 아침이면 다시 다짐 한다.

‘나 살찜 ㅠㅠㅜㅜㅜㅜ 우리 운동 열심히 하자!’
고등학교에 입학한 17세 이후로 지금까지, 나는 늘 ‘열심히 하자!’를 입에 달고 있다. 대학가는 데 목숨을 걸었던 그 때도, 취업에 허덕이는 지금도. 공부도 과제도 운동도 심지어 화장실 가는 것도 열심히 해야 할 판이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칠판에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라고 써 붙여진 교실에서 아침 7시 30분부터 저녁 10시까지 공부했다. 집중력이 흐려지거나 놀고 있는 나를 볼 때면 ‘왜 더 열심히 하지 못 하지’라며 자책했다. 사실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을 공부하라는 명제 자체가 잘못된 것인데도, 하면 된다식 논리는 나를 옭아맸다.

취업 기숙학원이 인기라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다. 재수생 기숙학원의 취업판이다. 숙식과 수업만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일과를 엄격히 관리해주는 곳이다. 어떤 학원은 원생끼리 친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름을 밝히지 않고 번호로 부른단다. 교도소가 따로 없다.

나는 고등학교 3년을 내내 기숙사에서 지냈다. 기숙사와 기숙학원은 전혀 다르지만, 처음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가 생각났다. 잠을 자는 방 말고 공부하는 면학실이 따로 있었다. 오후 10시,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기숙사에 돌아오면 11시부터 12시까지 의무로 공부를 해야 했다. 이후에는 선택적으로 공부를 하거나 방에 올라가 쉴 수 있다. 기숙사 입소 첫날, 공부 깨나 한다는 애들이 모여 있다 보니 서로 눈치싸움을 하느라 자정이 지나도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다. 2시가 넘어서야 빈자리가 생겼다.

일주일쯤 지나자 각자의 페이스로 돌아가긴 했지만, 졸린 눈꺼풀을 비비며 버티던 그날 밤은 내 고등학교 생활의 축소판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가까워진 친구들과 동고동락하며 3년을 버텼다. 대입보다 막막한 취업 앞에 서로 격려해 줄 친구 하나도 없이 지낸다니. 상상만 해도 스트레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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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pixabay



생존을 위해 열심히 달리기만 해야 하는 우리는 언제쯤 열심히 ‘안’해도 괜찮아질까. 좋은 대학 명패를 위해서 20살 이후로 모든 행복을 미뤘더니, 이제 사회의 구석이라도 차지해 먹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한다. 자유와 행복은 모두 나중 일이다. 우리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유예한다.

대체 열심히 안 해도 괜찮은 때가 오긴 오는 걸까. 늘 행복을 미루면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걸까. 이런 고민도 사치다. 질문은 ‘열심히’의 반대말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걸려있어 이 전선에서 자진퇴각을 할 수도 없다.

그래도 하고 싶은 직업이라도 명확한 나는 괜찮은 편이라 자위하면서, 직장에 들어가기만 하면 원하던 일이니 보람찰 것이라 기대하면서, 씁쓸함을 목 뒤로 밀어 삼키며 신문을 넘겼다. 다음 장에는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반퇴시대, 인생 후반 설계하자

인생 이모작 시대다. 퇴직 후에도 생계를 위해 구직시장을 떠날 수 없다…’

이빛나씨는 청년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학교 학보사에서 편집장으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