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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의 값 (박용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5:45
조회
531

박용석/ 회원 칼럼니스트


목숨의 값은 얼마일까. 세상 모든 것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시대니 이런 물음을 불경하다 탓하지 마시라. 진정 불경한 것은 목숨에 정당한 가격이 책정되지 않음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 나라에서는 목숨 값을 놓고 한해 1,777번 넘게 흥정이 벌어진다.


1년에 1,777명, 하루에 4명 꼴, 한국에서 2016년 한해 일하다 죽은 ‘노동자’의 수다. 정부 공식 통계다. 2015년 1,815명, 2014년 1,850명이었다. 인구 10만명 당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OECD 1위를 지키고 있는 수치 중 하나다. 그 중 사연 없는, 억울하지 않은 죽음이 어느 하나라도 있겠는가. 얼마 전 1주기를 맞은 구의역 김 군처럼 말이다. 굳이 그의 죽음을 예로 드는 것은 하나의 전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서다. 일을 하다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한 어떤 전형 말이다.


지난 약 20년 동안, 고용의 안정성과 근로계약의 형태에 따라 다양한 층위의 비정규직이 생겨났다. 연봉계약제 정규직(무기계약직, 또는 중규직으로 불린다), 기간제 계약직, 일용직, 법적으론 노동자로서 보호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까지. 여기에 기업 간의 하청, 도급관계 어느 지점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다시 1차 하청(1차 밴드), 2차 하청(2차 밴드)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건설업이나 물류운송업, 유통서비스업, 제조업 일부의 경우 도급 단계가 적게는 3단계, 많게는 7~8단계까지 된다하니, 얼마나 많은 종류의 비정규직이 있는 것인지 파악조차 되지 않는다.


20170621web01.jpg사진 출처 - 민주노총 전국건설노동조합


구의역 김 군의 경우 이중에 사내하청 기간제 계약직에 해당된다. 앞서 언급한 비정규직의 분류 중 생각보다 높은 층위의 비정규직인 셈이다. 7차, 혹은 8차까지 내려간 마지막 단계의 하도급사에서 일하는 일용직, 혹은 특수고용직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런데도 그는 목숨을 걸고 일해야 했고, 결국 목숨을 잃었다. 위험한, 그래서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르는 일은 보다 낮은 층위의 비정규직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볼 때, 김 군보다 더 낮은 층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얼마나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을지 짐작해볼 수 있다.


이런 전형은 사실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신분제 사회가 그랬고, 그만큼 멀리 갈 것도 없이 일제강점기 이후 지독히 사라지지 않는 ‘노가다’란 말에 내포된 전형이 그랬다. 이렇게 차별이 신분제처럼 굳어지고 있다고 우려한다면, 그것은 비약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층적 차별이 고착화되며 노동자들 간에도 차별적 의식이 움트고 있다는 우려를 비약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단적으로 건설노동자를 낮추어 부르는 ‘노가다’란 말이 지독히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노동자들의 처지가 ‘노가다’의 언저리로 추락하고 있는데, 우리의 인식도 그 말이 내재하고 있는 경멸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아직까지도 1,777명의 노동자 중 절반가량이 건설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있고, 또 목숨을 잃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 숫자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특수고용직’이나 일용직 노동의 특성상 근로계약이 불분명해 산업재해 사망자 통계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기업이 산업재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적당한 목숨 값’을 선 지불하고, 사고를 은폐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체 노동자 중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겠다’는 헌법 전문을 가진 나라에서 지속적으로 노동유연성을 강제한 결과다. 지난 20년간 개혁정권, 보수정권을 막론하고 일관되게 ‘강성귀족노조’가 문제라며 유연한 노동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유연한 노동은 기업의 수익은 극대화 시켜주었지만, 노동자의 허리띠를 졸라매게 했다. 이제는 그 허리띠를 목에 걸고 있다고 한다. 비정규직과 실업을 반복하는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희망을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말이다. 이 나라는 자살률도 세계 최고다.


노동자 중 절반이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회를 만든 제1의 책임은 정부에 있을 것이다. 출범한지 겨우 2달째인 ‘새정부’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적어도 절반은 책임져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묻는다. 우리의 목숨 값은 대체 얼마인가.


 

박용석 : 전국건설노동조합에서 일했었고, 지금은 서울시 노사정 협의 기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7년 6월 28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