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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1+2+3+4=10>(주만)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8-12-03 15:10
조회
843

주만/ 회원 칼럼니스트


 1. ‘대충 살자’. 케이크를 빵칼 대신 가위로 자르고 양말을 짝짝이로 신고도 개의치 않게 식사하는 등. 엉뚱한 이미지와 ‘대충 살자’라는 워딩(단어선택)이 궁합을 이룬다. 요즘 SNS에서 뜨고 있는 이 말은, 소소한 웃음을 유발하는 것으로 시작해 ‘맞아, 대충 살아야 해’라는 댓글로 끝을 맺는다.
 자신을 사회의 틀에 끼워 맞추고, 주변의 시선에 갇혀 살 필요는 없다. 이미지 속 인물들처럼 융통성 있게 행동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대충 살자’는 말에는 공감할 수 없다. 문제 상황을 재치 있게 해결하는 것과 “아 몰라, 대충 하자”의 차이는 분명하지 않은가? 융통성과 대충은 엄연히 다르다.
 SNS 속, 열정을 지녀야 마땅한 청년들에게 ‘대충 살자’라는 워딩이 와 닿았다는 점도 유감스럽다. 오락적인 표현일 뿐인데, 내가 너무 예민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어에는 힘이 있다. ‘대충 살자’라는 말을 계속해서 입에 담아내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말이 온몸에 흡수되어 가치관으로 굳어질지도 모른다.


 2. ‘관계에 힘쓰지 마라’. 이 말 또한, SNS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공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있어 보였다. 가정, 회사, 연애 등에서 상처받은 그들의 마음을 내가 감히 헤아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있었다고 해서 ‘관계에 힘쓰지 마라’하며 ‘관계의 벽’을 치자는 게 올바른 것일까?
 사회적 존재인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결성되는 ‘관계’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관계 속 구성원들은 각자의 역할에 힘쓰고, 서로 존중해야 한다. 그런데 그 노력을 하지 말라니. 지독한 경쟁 사회에서 관계의 회복이 없다면, 어디서 행복을 느껴야 한다는 말인가. 입맛에 맞는 사람들만 곁에 두는 게 좋다는 댓글을 남기는 사람에게, 현실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 말은, 공동체라면 꼭 있는 ‘문제아’ 때문에 힘 빼지 말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문제아들은 말을 해도 변하기는커녕, 상황만 어렵게 만들며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현실화하는 생명체다. 그렇다고 한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해결책일까?
 문제아의 초기행동에 반응하지 않으면, 비행의 도구는 점점 날카로워진다. 공격의 대상이 죽은 듯 반응하지 않게 되면 방향을 돌려 찔러댈 것이고, 무방비상태로 치명상을 입은 다른 피해자는 회복하지 못하거나 비슷한 문제아가 되어버린다. 문제아는 내버려 두면, 괴물이 된다. 힘들더라도 가해 행동에 반드시 애정의 말을 해주어야 하는 이유다.
 나열한 예시 말고도 세상에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가 존재한다. 관계로부터 파생된 불편함에 필요 이상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경우도 많다. 관계에 실망한 사람이 ‘벽’을 치는 선택을 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단단하게 굳어지는 그 벽을, 원하는 때에 마음대로 허물 수 있을까. 그리고 벽 뒤에 숨어 몸집을 키운 괴물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까. 관계에서 받은 상처에는 위로를 보내주고 싶지만, 좋은 인연과 올바른 사회를 막아버릴 수도 있는 태도를 응원하고 싶지는 않다.



사진 출처 - 한겨레


 3. 언제인가부터 우리는, 누군가가 쥐어주는 벽돌로 아무렇지도 않게 벽을 올리고 있다. ‘나는 벽돌이나 쌓으려고 태어난 게 아닌데!’. 힘들고 재미도 없는, 벽을 올리는 일에 ‘분노’한다. 벽을 충실히 쌓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노하면서도 벽돌을 쌓는 삶을 멈추지 않는다. 주변에 나보다 벽을 낮게 쌓은 사람이 있다면 ‘무시’하기도 한다. 심지어 벽돌은 수량이 제한되어 있다.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 때문에 벽돌을 얻지 못한다고 판단되면, 그 대상을 ‘혐오’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벽돌을 쥐어주면서 ‘너네는 벽이나 쌓으며 살아’라는 ‘그들’에게 분노해야지, 왜 똑같이 힘들이며 벽을 쌓는 사람을 무시하고 혐오하는가.
 빼곡하게 들어선 벽 너머로, 벽돌을 뺏고 빼앗으며 다투는 참혹한 소리가 넘어온다. 그 소리를 들으며 미소 짓는 그들이 보인다. 만족해하는 것을 보니, 그들에겐 이 소음이 그저 아름다운 선율 정도로 들리나 보다.


 4.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탓에 생겨버린 마음의 구멍에 다른 것이 채워진다. ‘더 재미있는 것, 더 자극적인 것.’
 ‘진지충’, ‘감성충’. 고민이나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의 또 다른 이름이다. 시도 때도 없이 고민이나 자신의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진지함과 감성은 조롱의 대상이 아니다. 자극적인 이야기로 재미를 유발하지 못하면 ‘벌레’가 되어버리는 현실에,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는 욕설과 허세 그리고 서로를 깎아내리는 말들로 가득하다. 저급한 말로밖에 유머 감각을 뽐내지 못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현대인들은 인간성을 잃은 채 심각한 ‘재미 강박’에 빠져 있다.
 현대인들은 과거 수준의 키스씬과 살인 장면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키스하면서 서로를 더듬다가 베드씬 정도는 가야지, 칼로 찔렀으면 피도 튀겨주고 죽였으면 토막도 내야지 그제야 흥미를 보인다. 무뎌진 자극을 충족시키기 위해 너도나도 나서서 상위 자극을 만들어 낸 결과, 이제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금만 검색해도 이런 장면들을 손쉽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나온 ‘범죄 도시’라는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 영화의 현실적인 묘사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 나를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특히 ‘장첸’이라는 인물이 작은 칼로 급소를 정확히 공격해 상대를 단번에 쓰러뜨리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이제 막 피어난 꽃이 꺾일 줄은.


 10. 공기 중에서 ‘1. + 2. + 3. + 4.’ 합산되어 ‘10.’ 같은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인생을 [1. ‘대충 살자’]는 [2. ‘문제아’]가 그저 [3. ‘나보다 낮은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거슬리게 했다는 이유로, [1-1. ‘열심히 살자’]는 꽃다운 청년의 목숨을 영화 속 [4. ‘자극적인 장면’]과 유사하게 앗아갔다. 내가 괴물이 범죄를 저지른 이유와 방법의 모티브를 잘못 짚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처럼 원한 관계가 없는 사람을 무참히 짓밟고, 젊은이가 노인을 폭행하며, 서로를 자극적인 말로 혐오하는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현주소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벽(관계or물질)을 쌓는 행동을 멈춰야 한다. 실력 있는 의사조차 “무기력함”을 느낄 정도의 충격적인 사건과 미친 괴물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면.
 -강서구 PC방 사건의 피해자와 유가족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며.-


주만: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 작가 지망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