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우리시대

‘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영어 권하는 사회 (유혜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0:52
조회
498

유혜진/ 객원 칼럼니스트



5년 전, 처음 대학에 입학하고 모든 것이 새로워 눈이 휘둥그레진 나. 그 중에서도 교양 영어 시간은 유독 즐거웠다. 영문법을 기계적으로 외우고 몇 가지 문제유형에 맞추어 답을 골라내는 연습이 전부였던 고등학교 영어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 시절 내게 영어는 그저 대학 입시를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학은 달랐다. 친구들이나 교수님과 직접 영어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주어졌다. 매주 A4 반쪽 분량의 영어 에세이도 썼다. '어젯밤 내가 꾼 꿈'과 같은 사소한 주제부터 '이랜드 파업, 대선, 탈레반에 대한 생각'까지. 한국말로도 쉽게 쓰지 않던 글을 영어로 꾹꾹 눌러 썼다. 주어와 동사 목적어가 전부인 꽤나 단출한 문장이었지만 열심히 썼다. 글을 쓰고 나면 교수님은 내 생각에 동의를 하거나 반박하는 내용을 담아 코멘트를 달아주었다. 점점 재밌어졌다. 내 생각을 좀 더 정교하게 표현하고 싶었고, 더 정확한 단어를 쓰고 싶었다. 열심히 사전을 뒤지고 교수님께 질문했다.

하루는 교수님께서 좋아하는 언어가 무엇인지 물으셨다. 고등학교 때부터 줄곧 프랑스어가 좋아 꾸준히 공부해왔던 나였다. 프랑스어를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교수님께서는 자신도 프랑스어를 잘 할 줄 안다고 반가워했다. 프랑스어로 번역된 한국 문학 작품들도 읽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내게 제안했다. 함께 언어를 공부하자는 것이었다. 내가 교수님께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나는 교수님께 프랑스어를 배우는 방식이었다. 공통언어는 영어였다. 그렇게 나는 매주 교수님의 사무실을 찾았다. 두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영어와 한국어, 프랑스어가 튀어나왔다. 우리의 공부는 자유로웠다. 교수님은 나를 위해 헌 책방에서 시몬 보부아르의 '제2의 성' 원본을 구해왔다. 하루 한 페이지 남짓이었지만 함께 책을 읽고 질문을 주고받다. 가끔은 샹송을 듣기도 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으셨던 교수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료들에 대해 물어왔다. 내가 미처 몰랐던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해 말씀하실 때면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또박또박 한국어 단어들을 MP3 파일로 녹음하는 긴장의 순간도 찾아왔다. 즐거웠다. 비록 나의 영어 실력과 프랑스어 실력은 교수님의 한국어 실력에 비해 더디게 늘었지만, 매 순간이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1년 간 함께 하며 '아, 대학에서는 이렇게 공부하는 구나' 싶었다. '영어'를 매개로 새로운 세상을 보고 또 다른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기쁨을 맛 봤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 후로 내가 만난 또 다른 대학의 영어는 '영어 강의'가 주는 스트레스로 똘똘 뭉쳐있었다. 그 곳에는 제대로 된 '영어'도, 제대로 된 '배움'도 없었다. 수업의 80% 가량만을 영어로 설명하고 한국말로 설명하는 교수님의 수업이 있었다. 학생들은 수업의 80%는 딴 짓을 하다가 마지막 20% 시간에만 집중을 했다. 원서 내용을 그대로 파워포인트에 옮겨 수업시간 내내 읽는 것이 한 학기 강의의 전부인 수업도 있었다. 어쨌든 강의실에선 영어가 흘러나왔다. 시험도 파워포인트 그대로였다. 영어강의가 절대평가임을 감안했을 때, 학생들에겐 최고의 인기 과목일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수학문제풀이가 많은 경제학 수업으로 몰려갔다. 한 학기 동안 필요한 영어는 제한된 경제학 용어와 필수 동사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칠판에 적힌 교수님의 풀이와 교과서만 있다면 한 학기는 웬만큼 버틸 수 있었다. 영어 실력과 전공 실력, 어느 하나 향상되지 않았다. 학생들은 '비싼 등록금을 내고 뭐하는 짓이냐'며 푸념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라는 형식에 치우쳐, 교육의 내용과 본질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제대로 영어를 배우기도 전 강의실에서 영어는 하나의 콤플렉스요, 스트레스일 뿐인 것이었다.

 

20110628web02.jpg
올해 초 카이스트에서는 4명의 학생이 자살해 큰 논란이 됐다. 징벌적 등록금제와 함께
100% 영어강의는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큰 부담이 됐다는 분석이 많았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사실상 대부분의 4년제 대학에서는 영어강의를 실시하고 있다. 대학 영어 강의의 명분은 '글로벌 캠퍼스'의 실현이다. 전공을 영어로 설명하며 영어 원서 책을 보는 것이 대학의 경쟁력과 학생의 경쟁력 모두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의문이다. 몇몇 대학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실질적인 경쟁력의 강화일까. 이해하기 힘든 영어 강의 내용으로 학생들에게 부담감만을 가중시키는 것이 경쟁력의 향상인지 말이다.

실제로 내가 들었던 영어 강의들도 대학 당국이 주장하는 '경쟁력'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 고등학교 영어교육과 대학 교양영어 강의와 연계되지 않은 영어강의의 무리한 도입은 학생들의 좌절감만을 키웠다. 수능과 내신에서 고득점을 했던 친구들도 강의내용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다며 매번 고민을 늘어놓았다. 고액의 영어회화 학원을 다니거나 영어 과외를 받았던 친구들은 조금 수월한 눈치였다. 그리고 수업의 흐름은 아버지의 직장에 따라 혹은 조기 유학으로 해외 연수의 기회가 있었던 친구들 위주로 돌아갔다. 교육 불평등의 한 양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강의실을 벗어난다고 해서 영어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취업을 위한 스펙의 또 한 축엔 '토익 점수'가 버티고 있다. 대학생들 사이에선 이미 '토익 점수=영어 실력'이라는 공식이 깨진지 오래지만 우리는 또다시 수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다. 사회가 요구하기 때문이다. YMCA의 한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중 7명이 영어시험 응시료와 강좌 수강료를 위해 연 평균 65만원에 육박하는 비용을 지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학생의 절반가량이 영어를 위해 해외연수를 떠나는 것을 감안하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영어 사교육에 쓰고 있는 것이다. 등록금 1000만원 시대, 대학생과 학부모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학에서 '영어 교육'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대학평가를 위한 '영어강의'와 토익점수를 위한 '영어와의 사투'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대학은 '글로벌 캠퍼스'를 주창하며 영어강의는 대폭 늘려놓았지만 강의 내용과 운용은 부실했다. 사회에서는 '글로벌 인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지만 누구 하나 영어를 가르쳐주는 이 없었다. 또다시 고등학교 시절처럼 스타강사와 족집게 강의를 따라 사설 학원으로 내몰릴 뿐이었다. 더 이상 나에게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즐거움이란 없었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영어는 더 높은 학점을 받기 위한 경쟁, 취업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의 장과 같은 것이다.

맹목적으로 영어를 권하는 사회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함께 올바른 영어교육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이제 막 시작된 대학가의 여름방학. 즐거움이 사라진지 오래다. 해외연수를 위해 비행기에 몸을 태우고, 토익학원으로 향하는 청춘들의 발걸음이 또다시 무거워지는 계절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