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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돈, 스물 청춘에게 묻다 (김새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1:23
조회
395

김새봄/ 객원 칼럼니스트


 

Intro. 돈, 스물 청춘에게 묻다

올해 반값 등록금을 외치던 청춘들의 목소리는 뜨거웠다. 대학생 신분으로 고액의 등록금에 빚쟁이가 되어버린 청춘들은 연대와 화합을 통해 거리로 나와 함께 외쳤다. 거대한 무리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들여다보자. 그들 개개인의 삶이 꿈틀댄다. 개개인의 청춘이 반짝거린다. 달콤한 청춘의 시기를 보낼 그네들의 삶이 돈의 무게감에 못 이겨 거리로 뛰쳐나오기까지 얼마나 쓰디썼을까.

여기, 한 대학생이 있다. 그 수많은 무리 중에 한 명이다. 나의 학보사 후배이기도 한 이 대학생은 이번 등록금 투쟁의 선두에 섰다. 단식을 하며 친구들의 마음을 한데 모았고,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게재해 자신의 솔직한 그러나 처절한 삶을 보여줌으로서 사회를 흔들어놓았다. 그런 그에게도 반짝이는 청춘이 있다. 자신만의 삶이 있다. 그를 만나면서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과연 돈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일었다. 그의 삶에서 돈이 청춘을 어떻게 괴롭혀왔는지를 보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 글은 인터뷰다. 하지만 인터뷰는 한 청년의 삶의 이야기다. 때문에 에세이로 쓰였다. 이 에세이는 돈이 뒤흔든 청춘보고서다. 이 청춘보고서는 그의 이야기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뒤흔들린 내 삶의 고뇌가 문장 곳곳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와 5년 동안 3번을 만났다. 숱한 만남들이 더 빈번했지만, 그에게 솔직하게 ‘네 청춘의 시기에 돈이 대체 뭐였냐’라고 불편하게 묻기 위해 만났던 것은 세 번이다. 이 세 번의 과정을 솔직하게 엮는다. 나와 그의 만남이 이 청춘들에 대한 변호를 위해 쓰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기에 만남의 기록은 우리시대의 청춘을 위한 혁명 제안서이기도 하다.
첫 번째 만남. 2007년, 소주 3000원

“사내 녀석이 그깟 일로 지 성질 하나 못 죽여서 어쩌려고 그러냐.”

대뜸, 위로를 바라고 토로했을 후배 녀석의 하소연을 난 묵살해 버리고 있었다. 장마가 오려고 해서인지 며칠 동안 하늘은 꿉꿉했고 바람은 습기를 잔뜩 머금었다. 우울한 어느 날이었다. 마주본 소주잔의 절반은 목구멍을 넘기지 못하고 철렁거렸다. 녀석은 많이 취해있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그 날 그 녀석은 울었다.

대구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했다. 밑으로 여동생 둘을 더 둔 후배네 집은 늘 어려웠다. 과외 2개를 뛰고 새벽 편의점 알바를 뛰어야만 자기 생활비를 벌고 남은 돈을 집으로 부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작은 페인트 가게를 하시지만, 온 식구가 먹고 살기엔 버거웠으리라 쉽게 짐작이 간다. 그게 더 상황이 좋지 않게 되어 어머니가 전화를 넣었던 모양이다. 후배 녀석은 학보사를 하고 싶어 했다, 휴학을 해서라도 신문을 만들고 싶어 했다. 생활비 부쳐줄 여유는 없으니 군대를 가던지 휴학을 해서 돈을 벌어 스스로 쓰라고 했다. 녀석은 결국 서울에서 생활하는 돈도 아까워 대구로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돈을 벌러 말이다. 여름방학에는 어쩔 수 없이 학보사 활동을 할 수 없게 됐다. 2년의 군복무를 미루고, 어머니의 욕지거리까지 들으며 기약 없이 새벽까지 돈을 벌어야만 하지만 신문만은 만들고 싶었던 게다. 그런 그의 동기가 여름방학동안 유럽여행을 가겠노라고, 신문 활동을 할 수 없다고 말했고 후배는 거기에다 대고 욕지거리를 던지며 뛰쳐나갔다. 그리고 3000원 짜리 소주를 마시며 이렇게 내 앞에서 토로했다.

돈이 대체 뭐냐, 아직 스물인 우리 앞에서 이 물음은 자못 무겁고 껄끄러웠다. 동갑내기 동기의 유럽여행과, 자신의 대구행은 같은 떠남이라 하기엔 너무도 큰 괴리다. 같이 신문을 만들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을 동기에게, 한 번도 싫은 소리 하지 못한 후배 녀석이 욕지거리를 던지면서 느꼈을 그 감정은 얼마나 복잡했을까. 대학에 와서 너무도 쉽게 돈을 쓰는 사람들과는 어울리기도 버거웠다. 끊임없이 소비가 필요한 하루 동안 덜 가진 우리가 더 많이 가진 타인과 함께 친구가 되는 일은 참 어려웠다. 돈이 감정을 붙들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두 한 강의실에 모여 함께 수업을 듣고 수업이 끝나면 저마다 제 분수에 맞는 소비를 치렀고 우리는 끊임없이 어느 만큼의 규모로 소비하는 소비자인가 매일매일 비교당해야만 했다. 스무 살 우리에게 돈은 대체 뭐였을까. 후배 녀석은 흐느끼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 2011년, 고료 100만원

“뭐 100만원?”

정확히 97만 1천원이었다. 만날 저녁과 커피까지 사줘야 했던 후배가 갑자기 고기 집으로 날 부르더니 오늘은 자신이 모두 내겠다는 선언 아닌 선언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100만원을 벌었다고 말했다. 그간 돌봐줘서 고맙다며 낄낄댄다. 대체 뭘 했냐고 재차 따져물었다. 그랬더니 ‘글’ 때문이란다.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썼는데 원고료가 그만큼 들어왔다는 거다. “대체 뭘 썼냐”라고 재차 따져 물으니 멋쩍게 웃으며 “읽어보면 안다”고 허허 거린다. 즐겁게 고기를 먹고 술 한 잔 기분 좋게 걸친 뒤 집에 들어와 가장 먼저 후배의 기사를 검색했다.

기사를 클릭한 순간, 난 무너져버렸다. 후배의 절절한 사연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집안 사정이 좋질 않아 몇 번씩 휴학을 하고, 새벽알바를 뛰고, 학보사를 그만두면서 군대를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어있을 줄은 몰랐다. 항상 밝게 웃고 다니는 후배였기에 짐작조차 못했다. 작은 페인트 가게를 운영하시던 아버지 사업은 부도가 나 집이 빚더미에 앉게 되어있다고 쓰여 있었다. 어머니는 위궤양에 걸리셨지만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해 약으로 버티는 중이라고 쓰여 있었고 자신은 학비를 벌기위해 3일을 아르바이트에 쓰고 남은 3일에 수업을 몰아서 듣는다고 쓰여 있었다.

결국 후배는 밥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학교 게시판에 단식 선언서를 내걸었다. 열흘 넘게 단식하며 반값 등록금을 위해 친구들의 연대 손길을 기다렸다. 반값 등록금을 위해 학교와 협상을 벌였다. 거리에 나가 더 큰 목소리로, 여기 대학생들이 있다고 사회에 소리쳤다.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게재했다. “죽어라 모아도 등록금은 만들 수 없어서”라며 웃었지만, 자신 뿐 아니라 모두의 문제라고 느끼기 때문이란 것을 안다. 자신의 문제가 버거울 만도 한데 이런 선택을 한 후배의 진심과 결정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후, 몇 번의 단식을 감행했고, 몇 번의 집회에 나갔고, 몇 번의 인터뷰에 응했다. 언론은 후배의 처절한 현실을 담고자 했다. 유력 일간지와 유력 방송사에서도 후배와의 인터뷰를 하고 싶다며 수차례 연락이 왔다. 가난을 팔기를 요청했고, 처절한 현실을 들려주길 요청받았다. 부모님의 인터뷰를 가장 원했다. 거기서 후배는 멈췄다. 거부했다. 부모님에게 자기 가난에 대한 책임을 거꾸로 되물으려는 언론의 행태를 가만둘 수 없었다. “부모님이 죄인도 아니고” 언뜻 후배의 눈에 눈물이 어른거렸다. 그가 가리키던 사립대학의 문제와 방관한 정부 그리고 무책임했던 사회를 되묻지 않고, 대신 그의 처절하고 안쓰럽고 고통스러운 삶만을 눈여겨보았다. 누추한 손가락만을 자꾸만 궁금해 했다. 청춘과 돈의 문제는 대체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걸까. 다시 스물 무렵의 고민이 가슴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둘 다 나이를 먹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물음에 답해주지 못하는 못난 선배였고, 그는 스스로의 해법을 찾아 실천하는 후배였다. 나는 청춘의 시기를 적잖이 벗어난, 그들의 문제로 지칭해도 좋을 시기에 접어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지독한 청춘, 청춘의 시기를 살아내는 중이었다. 그런 그는 이미 정답을 아는 듯 했다. 나는 궁금했다. 그가 택한 정답과 그 행함은 어떤 고통 속에서 결정된 것이냐는 것. 여전히 청춘은 아름답고, 여전히 돈은 청춘에게 무거운 그것이지 않느냐는 바로 그 물음이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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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1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반값등록금 촛불집회에 참가자들이 촛불과 피켓을 들고 있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세 번째 만남. 2011년, 고등어백반 5천 700원


“그 친구, 밉지 않아?”

순간, 밥숟가락을 입에 가져가던 그의 손이 멈춘다. 빗소리가 강하게 탕탕 내리꽂는다. 비릿한 비 내음과 고등어백반의 냄새가 어우러진다. 무거운 정적이 감돈다. 멋쩍어진 내가 먼저 책상위의 아무런 책이나 집어 들고는 “요즘 애들은 이런 책만 보나봐” 라며 혼잣말 한다. 오랜만에 찾아온 학보사 책상 위에는 경제학 개론과 토익책, 그리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어울리지 않는 책들이 조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 녀석, 피식 웃는다.

“밉긴요.” 피식 웃는다. 나도 웃는다. 사실은 알고 싶었다. 너에게 돈이 무엇이었는지. 꿈 많던 우리 청춘에게 대체 돈이 무엇이었는지. 대구에 가야했던 그에게 유럽여행을 가겠노라고 선언하던 동기가 아직 밉지 않느냐고 물었던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등록금 문제가 연일 신문지상과 방송에서 울려 퍼지고 있을 때, 그 한 가운데서 외치던 그 후배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원망스럽진 않았는지. 왜 더 많이 울지 않았는지.

솔직히 후배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그렇게 병에 몸저 누워계시고, 아버지의 빚은 집안을 좀먹고 있는 상황에서, 왜 단식을 하고 깃발을 들며 거리에 나서야 하는 것이 바로 너여야만 했냐는 물음. 여동생은 가고 싶어 하는 대학을 선택하는 대신 4년 장학금이 나오는 학교에 가야만 했고, 남동생은 대학보다 앞서 군대에 가야만 했던 현실 앞에, 왜 하필 가장 힘겨운 네가 깨지지 않는 유리벽에 대고 긴 투쟁을 시작해야 했냐는 물음은, 결국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목울대가 아파왔다.

몇 번씩 선배랍시고 그 녀석을 말렸다. 현실을 보라고 주제넘은 소리를 해댔다. 네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투쟁이 아니라, 빨리 졸업하고 남들처럼 연봉 높은 직장에 갈 수 있도록 서둘러 취업준비를 해야 한다고 몇 번씩 말했다. 학보사 시절, 사회부였던 후배에게 사회의 부조리를 침 튀기며 말해주고, 투쟁의 중요성과 대학운동의 필요성을, 집회 끌고 다니며 설파했던 내가, 그러던 선배라는 내가, 그 녀석에게 지금 해주던 말은 너무도 옹졸했다. 청춘의 돈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던 때에, 나는 책에 답이 있으리라 믿고 정치경제학을 배우러 뚜벅뚜벅 대학원으로 도망쳤다. 후배는 돈을 해결할 길이 없어 군대로 도망쳐야만 했다. 그랬던 우리가 비오는 2011년 여름, 이렇게 다시 마주보고 앉았다.

그런 후배에게도 평범한 꿈이 있었다. 남들이 흔히 말하는 성공에 닿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법학과인 후배는 군대를 다녀온 뒤 사법고시를 준비하겠노라고 누차 말해왔던 터다. 그리고 농담처럼, 가난한 학생들이 돈 없이도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장 ‘공정한’ 시험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군대에 가면서 사법고시에 필요한 책들을 싸들고, 필요한 자격시험 몇 개를 따면서 후배의 길은 정해진 듯 했다. 하지만 2007년, 로스쿨 법안이 통과됐다. 더 이상 가난한 학생들이 치를 수 있는 시험이 아니었다. 대학 등록금의 3배를 웃도는 로스쿨 등록금은 후배의 꿈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수천만 원의 등록금을 어떻게 벌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한해 등록금 500만원을 한 학기 휴학으로 겨우 벌었으니, 한해 수천만 원은 대체 어느 정도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전화를 해야 했을까. 군대에서 녀석도 뉴스를 들었겠지. 이제 돈 없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또 하나의 공정한 시험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돼버렸다는 것을. 끝내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만 했을까, 아니 할 수나 있었을까.

그의 소박한 식사는 계속된다. 문득 그가 생선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의 찬에는 고등어가 올라와 있다. “생선, 먹지 않았잖아?” 오랜 기억일지라도 습관처럼 남아있는 식사의 기억 때문이었다. 고등어 한 점 베어 물던 후배가 답한다. “그러게요. 그렇게 싫어하던 생선이었는데.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먹을 수 있게 되었네요.”

그에게 가난은 열두 살 때 뒷목을 내리치는 것이었다. 그의 가난에서는 생선냄새가 났다. 겨우 12살 때,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집안 곳곳에 붉은색 차압 딱지가 나붙었다. 대전 둔산동에서 쫓기듯 도망쳐 변두리 신탄지로 왔다. 5식구가 한 방에 살기 시작했던 때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선 좋은 대학에 가야만 한다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홀로 처절히 깨달았기 때문에 좋은 학교에 가고자 하는 욕심이 그 누구보다도 컸다. 중학교를 집에서 2시간 걸리는 곳으로 배정받고, 왕복 4시간에 걸려 학교를 다녔다. 그때 학교까지 한 번에 가던 좌석버스 1천 500원이 너무 비싸 2시간에 1대씩 오는 시내버스를 탔다. 학교 앞까지 당도하지 않아 15분은 족히 더 걸어야 했지만 돈을 아끼기 위해서다. 어쩌다 버스를 놓치면 수산물 시장 앞에서 1시간 반 동안 기다려야 했다. 그때 생선냄새를 맡으며 많이 울었다. 가난은 후배에게 생선냄새처럼 고약한 것이었고, 1시간 반 동안 기다려도 올지 모를 기약 없는 싸움이었다.

연애도 쉬울 리 없었다. 처음으로 가슴 설레던 동갑내기 친구를 집까지 바래다 주기위해 주머니를 뒤지니 겨우 1만 5천원만 수중에 남아있었다. 여자 친구에게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막차를 놓친 뒤라, 일단 여자 친구네 집까지 택시를 타고 함께 갔다. 택시 값을 치르고, 여자 친구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나니 갈 길이 막막했다. 늦은 밤이었다. 기약 없이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잠시 쉬고 걷다가 또 쉬었다. 그러다 정류장 벤치에 드러누웠다. 그렇게 첫차를 기다렸다. 후배에게 돈은 새벽밤길, 기약 없이 걷고 또 걸어도 집으로 갈수 없을 만큼 막막하고 무거운 것이었을 게다.

청춘의 시기의 돈이 너를, 나의 후배를, 우리의 청춘들을 이토록 잔인하게 현실의 벽에 내모는 시기에 후배는 나름의 답을 찾은 듯 보였다. 예전처럼 울지 않았고, 예전처럼 따져묻지 않았다. 나름의 방식으로 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등록금 투쟁은 시작이었다. 포이동에 찾아갔다. 학보사 시절, 포이동 기사취재의 연을 계속 잇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닮은 아이들을 그냥 지나쳐버릴 수 없었다. 취재 이후에도 몇 번씩 귤이며 사과를 사갖고 만나러 가기도 했다. 어떤 날은 수학을 가르쳐줬고 또 어떤 날은 영어를 가르쳐줬다. 그냥 가서 수다만 떨고 오는 일도 잦았다. 후배는 포이동 아이들에게 가난을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찾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가난이 자신의 탓이거나 부모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믿도록 해주고 싶다고 했다. 가난을 받아들이는 일이 설득이나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후배는 그저 자신의 겪은 삶을 들려주고 포이동 그네들의 삶을 들어주고, 서로 이해하고 공감해준다고 했다. 그것이 청춘을 처절하게 만드는 돈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추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말을 덧붙인다. 후배는 이 믿음을 자신의 삶을 통해 실천하며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를, 흔들고 있다.
Conclusion. 만남 이후, 작은 혁명을 꿈꾸며

울던 후배를 위로하지 못했던 못난 선배는 자라서 별 볼일 없이 꿈만 커다란 백수가 되었다. 가난을 받아들이기엔 너무 여렸던 후배는 자라서 자신을 괴롭히던, 역시나 자신뿐이 아니었던 청춘을 위해 돈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선두에 섰다. 등록금 문제 해결에 앞장섰다. 그런 후배가 더 이상 나의 후배일 수 없었고, 난 더 이상 그의 자랑스러운 선배가 될 수 없었다. 부끄러웠다. 그의 부름 앞에 붙는 '선배' 라는 호칭이 이렇게 무거울 수 있다는 걸, 그 녀석과 만나는 매 순간마다 느꼈다.

그리고 꿈이 생겼다. 날 믿고 따라는 후배 앞에 부끄럽지 않는 선배가 되는 꿈, 진짜 선배가 되는 꿈이다. 언론인이 되어 후배의 값진 선택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지지자 말이다. 후배와 같은 낮은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주고 힘 있게 지지해주는 진짜 언론인의 꿈이 꿈틀거렸다.

소주 잔 기울이면서, 이번엔 내가 먼저 후배에게 말을 걸겠다. 내가 고민한 새로운 작은 혁명이 무엇인지, 말해줄 것이다. 내가 쥔 펜으로 어떤 혁명을 기록해 나갈 것인지, 가장 먼저 들려줄 것이다. 소주 한잔과 후배의 꿈과 나의 꿈만으로 더 이상 가난이 우리의 청춘을 잠식하지 않아도 좋을 그런 실천에 대해 말할 것이다. 우리 다시 만날 그날, 어김없이 비가 내리겠지. 하지만 더 이상 빗소리에 잠식당하지 않을,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