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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여학생들 공대를 떠나 약대로 가다 (김인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1:21
조회
648

김인아/ 객원 칼럼니스트



개강이다. 전공과목인 생물분자공학의 수강 인원은 여덟 명. 50명이 들어가는 공간의 앞 줄만 간신히 채웠다. 식품저장학, 식품분석실험 등 다른 전공과목도 수강생이 열 명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강의실과 실험실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들이 사라져 간다. 늦은 밤 함께 실험실을 지키던 그 많은 친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내 주변을 보면 약대 진학 열풍으로 짐작된다. 식품공학 전공 강의를 듣는 대신 약대 준비를 위한 입시과목으로 몰려간 듯하다. 3년 전 230명 정원의 일반화학 강의는 약대 준비생들로 인해 수강생이 400명을 넘겼다. 콩나물시루 속에서 강의를 듣다보니 강의의 질도 떨어져 간다.

이공계 출신 여학생들이 약대 입시 열풍을 이끌고 있다. 한국약학교육협의회 통계를 보니 2012학년도 약학대학입문자격시험(PEET) 응시자는 1만3077명인데, 이중 여성이 8638명이다. 66.1%다. 전체 약대 합격률을 보면 남녀 비율이 3:7이다. 대부분 이공계 출신자들이 이 시험을 본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대에서 약대 열풍이 더 두드러진다. 의치약학 입시전문 교육기관의 신입생 분석 자료를 보면 으뜸이 이화여대 출신이란다. 실제 지난해 12월 이화여대 자연과학대학 3학년 학생의 29.3%인 88명이 자퇴했다. 경제적 사정 같은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약대 진학을 목표로 했을 의도적 자퇴란 말이 학생들 사이에서 떠돈다.

이화여대 공대에 다니는 김모(23)씨도 지난해 3학년 2학기를 마치고 약대 진학을 결심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과도한 취업 경쟁 속에서 느끼는 불안감이 가장 큰 이유였다.

“요즘에 대학만 졸업해서는 전공 살려서 취업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요. 공대니까 취업이 쉽겠다고 하지만 취업도 취업 나름이죠. 비정규직이 대부분이고, 평생직장은 꿈도 못 꿔요. 대학원가서 석․박사를 하면 괜찮을까 생각했는데 선배들 말을 들어보니까 오히려 취업문이 더 좁아진대요. 거기다 들어가는 돈하고 시간은 오죽한가요? 따지고 보면 약대를 가는 게 훨씬 낫죠. 나중에 결혼해서 애 낳고 키울 때도 안정적인 직업이 있으니 안심이잖아요.”

김씨는 자신의 여동생 역시 함께 약대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김씨의 동생은 모 사립대 자연과학대학에 입학 후 바로 약대 준비를 시작했다. 자연대에 진학한 이유 역시 약대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주변 친구들 중에 생물학, 화학 같은 순수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경우가 있어요. 근데 그 친구들 보면 경영이나 경제학 복수 전공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예요. 대학원 진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구요. 아마도 동생이 약대 준비를 할 계획이 없었더라면 아마 다른 전공을 선택 하라고 했을 거예요. 돈 잘 벌고 취업 잘되는 쪽으로요.”

김씨의 고민은 이공계 여성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2010년 여성과학기술인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규직 여성 비율은 10.6%였다. 반면 비정규직의 경우 31.1%로 약 3배정도 더 높게 나타났다. 심지어 정규직 여성 신규채용비율은 전년도에 비해 1.7% 감소한 15.3%로 나타났다. 취업도 힘들다. 그러나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기는 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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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대 입시 설명회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결혼으로 가정을 이루면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된다. 가장 활발히 연구를 해야 하는 시기에 출산과 육아로 공백 기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연구 중단으로 기술 개발이나 논문과 같은 연구 실적을 내기도 힘들다. 성과가 부족하면 연구책임자로의 승진도 연구비 지원도 어려워진다. 엄마 과학자로 살아가기는 현실적으로 쉽지만은 않다.

이제 곧 졸업이다. 내년 2월이면 4년간의 대학생활도 끝난다. 함께 졸업을 앞 둔 08학번 동기는 단 한 명. 나머지 26명의 친구들은 저마다의 사정으로 졸업을 연기했다. 그리고 일부는 약대로 떠났다.

4년간 등록금으로 4000만원이 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탓에 매 달 집세와 생활비로 100만 원 정도를 꼬박꼬박 쓰고 있다. 명절이나 주말에 고향집에 내려가 부모님을 뵐 때면 반가움보다는 죄송한 마음이 앞선 지 오래다.

실험실에서 늦은 밤까지 청춘을 바쳤다. 그러나 남는 것은 졸업장 하나다. 취업 준비는 별개다. 하고 싶은 일만을 꿈꾸며 살기에 현실은 차갑기만 하다. 전문직만이 대우받는 현실. 전공과 취업이 따로 노는 현실. 여자 공대생에게 약대 진학만이 유일한 해법처럼 보이는 이 현실을 바꾸어 볼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일까. 오늘도 답답함만 커져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