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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장애를 아는가? (김종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1:42
조회
340

김종현/ 청년 칼럼니스트



내가 다니고 있는 대구대학교가 올해 장애대학생 교육복지 지원평가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되었다. 학교 당국은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누구에게나 편리한 장애 없는 캠퍼스”, “장애학생이 행복한 대학.” 분명 자랑스러워야 할 일이지만, 재학생으로서 느끼는 심경은 복잡하다.

얼핏 보면 매스컴을 통해 듣는 화려한 소개가 맞는 말 같다. 초․중․고를 통틀어 제도권 교육 12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장애학생을 대학에 들어온 뒤에는 사귈 수 있었다. 확실히 캠퍼스를 거닐다 보면, 캠퍼스 밖에선 거의 볼 수 없는 장애학생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수화, 맹인안내견, 전동휠체어 같은 일상에선 꽤 낯선 모습도 포함된다. 장애학생 학습지원 시설이나 설비 등을 봐도 겉으로는 별 문제 없어 보이는 ‘학교홍보’가 나는 왜 이리도 민망하고 불편할까.

일전에 수업 공동과제 때문에 조모임이 있었다. 우리 조엔 대여섯 명의 청각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들이 섞여있었다. 나는 고학번이라는 이유로 조장을 맡아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얼마가 지났을까. 수화통역사가 장시간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순조롭게 진행되던 대화는 일순간 혼란에 휩싸였다. 청각장애학생과 소통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몸짓, 필담을 동원해가며 어설프게 말을 이어 겨우 혼란은 일단락되었지만, 간단한 수화조차 할 줄 모르는 조장은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원망을 품고 있었다. 이 날의 경험은 아직도 나에게 서글픈 잔상으로 남아있다. “나는 왜 수화를 모르는 걸까.”

고백하기 머쓱하지만, 나는 수화법이나 구화법, 심지어 전동휠체어의 사용방법을 전혀 알지 못한다. 어설프게 변명해보자면, 그런 교육을 전혀 받을 기회가 없었다. 바로 여기서 장애, 장애학생을 바라보는 학교의 관점이 드러난다. 적어도 ‘장애 없는 캠퍼스’라고 홍보하는 학교라면, ‘영어’보다도,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을 이어주는 ‘언어’에 민감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진정 ‘장애’ 없는 캠퍼스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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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장애인차별철폐대구투쟁연대'는 17일 오전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 4년째를 맞았지만
여전히 변한 것이 없다"며 장애인 차별 시정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그러나 학교는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소통할 수 있는 ‘언어의 공유’에는 무감각하면서도, 장애학생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려를 지상과제로 떠받들고 있다. 그 ‘착한 마음’을 들여다보면 학교가 장애를 보는 시선은 시혜와 동정에 고정돼있고, 장애학생을 복지와 지원의 대상으로만 치부하는 듯하다. 그들에게 있어 장애학생들의 수업권과 이동권은 지원과 서비스의 문제지, 결코 권리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언어’에 민감하지 않다면, ‘권리’에는 둔감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장애학생이 행복한 대학’에서 청각장애학생은 수화통역사와 속기사가 부족하단 이유로 온전한 수업권을 침해당하고 있고, ‘장애 없는 캠퍼스’에서 전동휠체어를 사용하는 지체장애학생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단과대에 한 번도 가보질 못했다. 학교구성원으로서 장애학생의 ‘권리’는 ‘예산’과 ‘재정’ 앞에서 한낱 공허하고 초라한 단어 일뿐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학교가 ‘장애학생의 메카’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학교에 비해 장애학생에 대한 지원체계가 ‘비교적’ 잘 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듯, 복지의 ‘상대성’이 권리의 ‘절대성’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학교의 온정적, 시혜적인 장애학생 복지 정책은 곧 장애를 '개인의 것'으로 보는 관점을 품고 있다. 위험한 시선이다. 장애가 개인의 것으로 치부되는 순간, 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는 살해되고 차별은 정당화 된다. 장애라는 차이가 ‘차별’이 되는 것이다. 장애학생은 보호받아야 할 특수한 대상이 아니라 똑같은 학교 구성원이다. 그렇다면 학생으로서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들’이 ‘복지 서비스’보다 우선하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주. 다가오는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맞이해 학교가 내건 슬로건이다. 일주일 동안 장애학생들을 위로, 격려하기 위해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야심찬 행사가 준비됐다. 학교 본관에 위치한 스카이라운지를 비롯한 캠퍼스 곳곳에서 다양한 행사가 진행된다고 한다. ‘눈 가리고 아웅’이란 말이 나올 법하다. 장애학생들이 원하는 건 일방적인 배려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임을 학교는 진짜 모르는 것일까?

그러나 사실 저 불편한 시선은 비단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사회가 장애, 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의 산물이다. 장애문제를 권리의 차원에서 이야기하지 않는 우리 학교가 장애대학생 교육복지의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되었다는 ‘비보’는 그래서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이 슬픈 소식 속에 장애문제에 대한 우리사회의 시선이 그대로 투영된 것만 같아 서글프기만 하다.

곧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다. 아니 ‘장애차별 철폐의 날’이다. 이 날의 진정한 의미를 고민하기에 앞서 나는 행사준비에 분주한 학교당국과 우리사회에 익숙하지만, 낯선 물음표를 던지고 싶다. 과연 우리는, 장애를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