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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에 시간을 보장하라!” (권지은)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1:41
조회
313

권지은/ 청년 칼럼니스트



곧 총선이다. 정당들 모두 ‘청년문제’의 대책이 될 법한 공약들을 내걸었다. 새누리당은 맞춤형 복지정책,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MB의 ‘추억의 약속’ 반값등록금 실현, 진보신당은 일자리의 질적 개선을 위한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을 주요 골자로 삼았다. 일자리 수 늘린단 얘기는 당연히 있다.

너무 좋아하지는 말자. 청년들의 삶이 말도 안 되게 고달파진 건 꽤 오래 묵은 일인데 이제야 ‘청년’이 선거의 화두가 된 것은, 권력을 쥐었던 정당들이 이름표를 슬쩍 바꿔달고 과거를 모른 척해야 할 만한 위기를 맞은 사정 탓이고, 지난 10.26 보궐선거 때 경험한 2030의 의외의(?) 표심 때문이니까.

청년에 대한 이전의 방관, 혹은 단순한 연민에 비하면 반가운 소식이긴 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청년문제를 이야기할 때, 이 문제적 상황이 여러 가지 사회문제 중에서 하나의 ‘부분’을 차지할 뿐인 것처럼, 혹은 청년이라는 존재가 사회적 소수 집단인 것처럼, 그래서 마치 무언가 베풀어 줘야하는 대상처럼 이야기되는 경향이 있다. 혹은 어떤 ‘유행’처럼.

취업, 취업, 일자리, 일자리. 청년문제의 핵심. 대학을 나오고 화려한 스펙과 영어성적을 가져도 도무지 취업이 어려운 것이 문제. 청춘콘서트, 아프니까 청춘이다 등의 ‘청춘류’ 책들이 인기몰이를 한 이유도 이 취업의 곤란함에서 시작됐다. 맞다. 그래서 정당들의 공약에서도 일자리 ‘수’를 늘리겠다는 선언이 많다. 그런데 우리는, 진짜로, 취업문제만 해결되면 만사형통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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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졸업생과 학생들이 청년실업 해결을 촉구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취업을 했냐, 안했냐로 한 청춘에 대한 질문이 끝나버리는 요즘. 하지만 취업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자 모든 해결의 열쇠인 듯이 말하는 것도 나는 ‘유포된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삶을 버거워하는 청년들에게 주어지는 위로란, “젊은 패기로 다시 도전해서 취업에 성공하라 내지는 창업하라(!)” 정도에 머물면서, 취업 혹은 사회적 성공이, 그 바늘구멍의 통과가, 지금 피폐한 삶의 종지부인 것처럼 기존의 권력과 미디어는 반복해서 알린다.

‘취업만능주의’가 유포된 거짓말이 아니라면 취업에 성공한 청춘들에게서는 “취업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란 반가운 소식이 전해 와야 할 텐데, 내 주위에서 그런 해피엔딩은 흔하지 않았다. 취업한 친구들에게 많이 듣게 되는 말은 “재미없다” “피곤하다” “그냥 그렇지 뭐” 같은 삶에 대한 무기력한 냉소들이 더 많다. 경쟁의 문을 통과시켜서 승자 패자를 갈라놓았는데, 결국 ‘승자의 스토리’도 실종된 상황. ‘취업여부’보다 이 ‘미스테리’가 바로 우리 청년문제의 핵심이다. 일자리 ‘수’만이 중요한 게 아닌 이유다.

딜레마다. 취업을 못하면 돈을 벌 수 없고, 취업을 하면 돈‘만’ 벌면서 살아야 하는 것. 취업을 하기 전엔 스펙 마련과 학점관리, 영어공부로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고, 취업을 하면 대출이자상환, 야근으로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게다가 비정규직이면 저임금과 고용불안정에까지 시달려야 한다. 정규직이라 해도 야근과 직장 내 경쟁, 조직생활이라는 ‘감정노동’으로 파김치가 돼서 주말만을 기다린다.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보다 하루를 ‘견뎌내는’ 사람이 더 많다.

‘취업’이 우리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본의 아니게 잊혀진 것이 있다면 그건 ‘삶 그 자체’가 아닐까? 취업도 당연히 ‘행복’하려고 하는 것인데, 우리는 그간 행복할 ‘여유’가 없어져버렸다. 삶이 너무 팍팍하다. 외롭다. 취업 전이나 후나, 마음에 조금의 틈이 없다. 당연히 사람과 사람 사이의 돌봄과 관심이 사라지고,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해서마저도 성실히 접근할 여유가 통 없다. 돈이 문제지만, 돈이 있어도 말이다. “이게 사는 건가?”하는 허무한 질문이 속 깊은 곳에서 툭하고 차오른다.

지금처럼 ‘삶’을 이야기 하는 게, ‘여유’를 이야기 하는 것이, 유치하거나, 혹은 그저 급진적으로만 보인다는 게 ‘현실’이 돼버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더, 이제부터의 새로운 요구란, 그리고 새로운 정치란, ‘삶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게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런 슬로건을 제안해본다. “우리 삶에 시간을 보장하라!”고.

청년문제는 사실 ‘모든 것’의 문제이고,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한 사회의 기획이 아닌가. 지금 우리라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의 여유를 찾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 볼 여유, 친구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여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여유, 사랑을 할 여유, 삶을 고민할 여유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누구에게나 물리적으로 어느 정도의 자유시간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정책적으로 본다면,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함께, ‘노동시간 단축’이 청년정치의 중요한 이슈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일자리 수에 그치지 않고, 일자리의 ‘질’에 대한 고민이 더 넓고 깊어져야 한다. 여기에서 ‘질’의 평가 기준은 그 동안 임금이나, 고용안정의 차원에서 이야기 돼왔지만, 더불어 “인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의 ‘인권적 차원’의 문제마저도 고려, 소망, 상상하게 되기를 바란다.

‘노동시간 단축’은 일자리 ‘수’를 늘리는 문제와, 최저임금인상, 나아가서 기본소득실현의 문제와도 자연스럽게 맥이 닿을 것이다. 이번 총선에 눈을 부릅뜨고 공약들을 뜯어보자. 어느 정당이 우리의 시간을 보장할지. 그리고 선거가 끝나고서도 계속 생각하고, 요구하자. 68혁명의 그들이 “우리는 모든 것을 원한다”고 했듯, 우리의 모든 것, 빼앗긴 시간을 돌려달라고.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인 ‘삶’을 원한다고. 도대체가 이게 사는 건가?

“우리 삶에 시간을 보장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