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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는 정치적 표현을 할 수 없을까? (조재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1:33
조회
363

조재희/ 객원 칼럼니스트



학교에 가면 친구들을 만난다. 자연스레 대화는 이뤄진다. 주제는 일정하지 않다. 그날의 이슈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컴퓨터를 켜면 SNS를 접한다. 유명인부터 가족, 친구까지... 대화 상대의 폭은 넓다. 그들과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다. 때때로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가장 큰 정보의 원천은 따로 있다. 바로 신문, 뉴스 등의 매체이다. 하지만 이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공적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적 표현이라 볼 수 없다. 따라서 개인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언론의 목소리이다. 전문가나 여론의 목소리일 수도 있다. 이처럼 일상은 정보 교환의 연속이다. 또한 의견 표현의 연속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판사들이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SNS에 게시한 글 때문이다. FTA 관련 입장을 언급하였다. 정치적 패러디 물을 게시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입장은 팽팽히 맞선다. 일각에서는 정치적 중립의 침해를 주장한다. 게시물이 지나치게 정치 편향적이라는 것이다. 일반 국민과 판사와의 차이를 언급한다. 그들에게 중립적 표현을 요구하기도 한다. 판결에 영향을 미칠까하는 우려 때문이다. 이는 사법부의 신뢰를 저하시킨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이들도 상당하다. 표현의 자유는 헌법상의 기본권임을 내세운다. 기본권은 함부로 침해할 수 없는 권리이다. SNS가 개인적 공간임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를 제한하는 것은 기본권의 과잉침해라는 것이다. 이처럼 논란에 대한 의견은 다양하다. 이는 정치적 중립, 표현의 자유, SNS의 특성 등과 관련되어 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적 중립이다.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 된다.” 이것이 헌법상의 규정이다. 이 규정은 신중히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는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규정이라 보기 어렵다. 올바른 직무 수행을 위한 규정이라 보아야 한다. 특정 정파에 구속받지 않도록 중립을 보장한 것이다. 사법부는 독립성이 필수적이다. 소신 있는 직무를 위해서이다. 이를 위해 정치적 운동, 특정 정당에의 가입은 제한받을 수 있다. 선거와 관련해 중립을 요구받기도 한다. 이는 직무 수행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모든 정치적 표현을 제한해선 안 된다. 무조건적 제한은 정치적 무의식 상태를 강요한다.

표현의 자유는 헌법상 보장되어 있다. 이는 개인이 가지는 기본권이다. 기본권이라 해서 무작정 보호받는 것은 아니다. 기본권도 법률로써 제한 할 수 있다. 바로 ‘법률 유보의 원칙’에 의해서이다. ‘헌법 제37조 2항’이 대표적인 제한규정이다. 사회 질서, 공공복리에 따라 제한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도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본질적인 부분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판사의 표현의 자유도 마찬가지이다. 제한을 하더라도 최소한도여야 한다. 직무 관련 범위 내로 한정함이 적절하다. 재판 중인 사안에 대한 입장 언급은 문제가 될 수 있다. 다른 재판에 압력을 줄 수 있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논란이 된 SNS 글들이 이에 속한다고 보기는 무리이다.

SNS의 파급력은 크다. 그렇다 하여 공적인 의사표현이라 볼 순 없다. 블로그, 미니홈피 등도 마찬가지이다. 법원 홈페이지와 SNS는 성격이 다르다. SNS를 엄격히 규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무엇보다 실효성이 의문이다. 뛰어난 전파가능성 때문이다. 수많은 SNS 사용자들이 글을 올린다. 이용자는 1초에 2000만 명에 이른다. 또한 대체로 해외 서비스에 해당한다. 과도한 규제는 국가 간 비대칭 문제를 불러온다. 물론 무제한적으로 허용할 순 없다. 현행법의 범위에서 제한할 필요가 있다. 사이버 범죄 처벌, 음란물 규제 등이 그 예이다. SNS의 지향점은 활발한 소통이다. 따라서 다수에게 개방되어 있다. 리트윗과 공유를 통해 널리 퍼진다. 그러나 기본적인 구성은 팔로워와의 개인적 대화이다. 작성자가 판사라고 해도 이는 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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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8일, 창원 지법의 한 판사가 자신의 SNS를 통해 정치적 패러디 사진을 올려 큰 이슈가
되었다. 여기에는 사법부의 정치적 중립과 개인의 표현의 자유 등 다양한 쟁점이 얽혀 있어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모든 국민은 기본권 향유의 주체이다. 판사도 국민 중 한 사람이다. 자유로운 사고와 입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국민과의 소통이 필요하다. 오히려 이는 장려해야 될 일이다. 사법부의 소통부재는 문제가 되어 왔다. 이는 엘리트주의와 국민의 불신을 만들어냈다. 소통 없이 자신만이 편견에 갇힐 수도 있다. 이로 인해 고루한 판결을 지속할 수도 있다. 변화하는 사회의 반영은 소통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를 반영하지 못하면 문제가 된다. 사회적 분쟁 해결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절실하다. 배심제도의 도입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또한 그들은 법 분야의 전문가이다. 일부 언론의 표현처럼 ‘시정잡배’가 아니다. 특정 언론에 따른 맹목적인 비난은 옳지 못하다. 사법부에 대한 색안경을 벗고 생각해 볼 문제이다.

다양한 사람, 다양한 매체로부터 정보를 얻는다. 정보의 범위는 참으로 광범위하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정보를 흡수하진 않는다. 이들 정보를 취사선택한다. 선택의 기준은 개인의 관심사, 정치적 신념 등이다. 이는 개인의 성장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보통 가정과 교육기관이 중심역할을 한다. 성인이 된 이상 개인의 몫이기도 하다. SNS는 정보를 강요하지 않는다. 공감하면 팔로잉을 통해 따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차단할 수도 있다. 이처럼 개인의 선택에 의한 취득과 교류가 가능하다. 문제는 특정 언론의 과장 보도이다. 이는 개인의 표현을 공적 영역으로 옮겨온다. 그 과정에서 사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순기능은 철저히 외면한다. 오로지 역기능만을 부각시킨다. 생각의 차이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바람직하지 않은 의견이라면 대중이 먼저 외면할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그 정도의 자정능력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