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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따뜻한 겨울 (유혜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1:27
조회
315

유혜진/ 객원 칼럼니스트



"어머, 이거 얼마에요?" 첫 손님은 예상치 못한 아주머니 세 분이었다. 학교 자원봉사센터에서 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위한 기금을 모을 때였다. 나와 친구들은 스포츠 의류업체를 운영하는 동문이 기증한 물품을 팔고 있었다. 학생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중앙도서관 앞에 천막을 치고 물품들을 꺼내놓았다. ‘따뜻한 중도 라이프!’ 자취생과 복학생을 유혹하는 문구가 적힌 A4용지가 나부끼고 있었다.

뜻밖에도 잊을 수 없는 나의 첫 번째 손님은 학내 환경미화원 어머님이었다.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하시면서도 꼼꼼하게 색상과 디자인을 살피셨다. 미화원 어머님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는지, 그날 하루 종일 학생들 사이로 어머님들이 찾아와 기금 모금에 동참해주셨다.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천막을 정리하면서 나와 친구들이 가장 크게 느낀 것은 한 가지였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학교 구성원이 많다는 것. 기껏해야 학생과 교수, 교직원이 학내 구성원의 전부라고 생각했을 때, 얼마나 많은 미화원 어머님과 경비 아저씨, 주차요원 분들이 수고해주시는지 처음 깨달았던 순간이었다. 대다수의 학내 구성원들의 시선 밖에서 이 분들은 우리를 위해 장시간 동안 제대로 쉴 틈도 없이 일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된 순간이었다. 벌써 2년 전 일이다.

난 자리가 크다고 했던가. 우리 학교 학생 대다수가 미화원 어머님의 존재를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부끄럽게도 지난 3월이었다.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청소노동자들이 연대 파업을 벌이며 어머님들이 잠시 학교를 떠난 사이였다. 학교 화장실에선 냄새가 진동하고, 쓰레기통엔 쓰레기가 넘쳐났다. 불평의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그러나 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지에 대한 대다수 학생의 고민은 적은 듯했다. 누군가가 어떤 부당한 대우를 받는지, 좁은 공간에서 밥 먹을 틈도 없이 이 쓰레기를 치우고 화장실을 닦았던 사람이 누구였는지도 여전히 관심 밖이었다. 불편할 뿐이었다. 물론 몇몇 학생들은 직접 힘을 싣기 위한 행동에 동참했고, 일부는 학내 청소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는 전화를 학교 당국에 걸며 큰 힘을 보탰다.

한 달이 지나서야 학교 측은 임금 인상을 비롯해 휴게 공간 확충 등 전반적인 노동 환경과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노동자와 용역업체 사이의 관계가 실질적으로 개선될 수 있도록 힘쓰겠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어머님들과 학생들은 축배를 들었고 다시 학교는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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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학내 청소노동자들은 한 달여의 파업을
끝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진 출처 - 연세춘추


 

그러던 9월의 어느 날, 어머님들이 또다시 천막으로 모여야 했다. 용역업체에서 한 청소노동자를 부당하게 해고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쌀쌀한 가을 날씨, 연세대학교 본관 앞에는 파란 천막이 한동안 걷힐 줄 몰랐다. 사측은 부당해고와 더불어 지난 4월 맺었던 협의를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사측으로부터 청소 노동자들이 노조 탈퇴를 강요당한다는 정황도 알려졌다. 탈퇴서를 돌리는 식이었다. 학교 당국은 3월에 그랬던 것처럼 노사가 해결해야할 일이라며 발뺌하기 바빴다. 용역업체는 꿈쩍하지 않았다. 도리어 학교가 10월 1일 수시 논술고사를 앞두고 천막을 철거해달라는 공문을 보냈다는 사실이 알려져 학내에 분노가 일었다. 이 사태는 50일이나 이어졌다.

다행히 그 후 해고는 취소됐고 부당행위를 저지른 용업업체 담당자는 발령처리를 받았다. 학내 구성원들은 기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내 미화원 어머님들의 불안한 고용과 노동환경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3월 파업, 10월 천막 농성의 산은 넘었지만, 여전히 실고용주인 학교당국은 방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용역업체는 우려했던 대로 복수노조를 설립하려 든다. 3월 파업 당시 합의했던 사항도 다 지켜지지 않은 채 말이다. 직접 고용은 힘든 것을 인정한다며, 학교 측이 용역업체의 관리에만 소홀하지 않아도 좋겠다는 한 미화원 어머니의 인터뷰가 잊혀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사태를 이렇게 만든 가장 큰 책임은 직접고용을 회피하는 학교에 있다. 갈수록 꼼수를 부리는 용역업체를 압박할 수 있는 권력도 학교에게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권력'을 압박할 수 있는 힘은 여전히 우리 학생사회에 있다. 지난 사태에서도 총학생회를 비롯한 각 단과대와 학생단체, 지역단체의 힘이 컸음을 보여주었다. 여전히 낮은 보수로 장시간 근무하며, 좁은 공간에서 잠깐의 휴식만 허락되는 어머님들을 위한 관심과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에 대한 인식이 잠깐이 아닌 삶 속으로 스며들고, 그 삶이 작은 행동으로 전환된다면 어떨까. 올겨울이 그렇게 춥지만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