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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도 10년 후에도 학교 폭력은 (유혜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1:35
조회
421

유혜진/ 객원 칼럼니스트



‘발바닥일까? 목덜미일까?’ 수학시간이 다가오면 교실에는 으레 긴장감이 맴돌았다. '사랑의 매'를 자주 드시던 수학선생님. 선생님은 보통 수학 문제를 공책에 베껴오지 않거나 아이들이 소란스러울 때 큰소리를 내셨다. 막대기를 가져오신 날엔 책상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발바닥을 맞았고, 막대기가 없는 날엔 손으로 직접 아이들의 목 언저리를 때리셨다.

전날 나는 심한 감기에 걸려 수학숙제를 해올 수 없었다. 선생님의 손에 막대기가 없었다. ‘목덜미구나!‘ 익숙하게 목을 왼쪽으로 살짝 꺾었다.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내 얼굴이 시뻘게졌다. 뒷자리의 친구는 부풀어 오른 듯도 했다. 언제 맞아도 기분이 나빴다. 울면 또 맞는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만약 그날 선생님이 막대기를 들고 오셨다면 나는 까치발로 콩콩 뛰며 자리로 돌아왔을 것이다. 발바닥이 너무 따끔거려 제대로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급기야 몇몇 아이들은 선생님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이미 체격 조건이나 성적, 용돈 씀씀이에 따라 학생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서열화가 굳어진 상태였다. ‘힘’이 있는 아이는 그렇지 않은 아이에게 묻기 시작했다. “발바닥 맞을래? 목덜미 맞을래?” 장난이 시늉으로, 시늉이 폭력으로 이어졌다. 꼭 선생님 흉내가 아니어도 학교 폭력은 다수의 침묵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10년 전 나의 중학교 시절이다.

10년이 지나도 학교폭력은 줄지 않은 듯하다. 진보교육감 당선 이후 학교 교육 현장이 학생 인권 회복을 위한 움직임으로 뜨거워졌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오장풍 교사’ 등 체벌로 인한 사회적 논란이 끊이지 않더니 최근에는 학생들 사이의 폭력이 큰 이슈가 되고 있다. 대구와 광주에서 일어난 중학생 자살 사건은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상기시키는 정도를 넘어 교육 현장의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끔직한 폭력을 스치듯 지나치는 학생, 학교 현장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교사와 교육 당국, 이 모든 것을 믿기 힘들다며 울부짖는 학부모. 모두가 반성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학교 폭력을 두고 나오는 해결방안이 어딘가 불편하다. 지나치게 사후 처벌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고민하기보다 형사처벌 강화나 격리 수용 등 처벌의 수위를 높이는 제도 마련에 급급한 모습이다. 강도를 높인다고 해서 학교 폭력이 실제로 줄어들지도, 신고율이 증가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어린 시절 ‘낙인’이 개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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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교육청은 처음으로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해 자율적이고 민주화된 교육 현장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우리는 논의를 학교 폭력을 예방할 수 있는 근본적인 방안 모색에 몰두해야 한다. 교사부터 학생을 규율의 대상이 아닌 인권을 지닌 주체로 바라봐야 할 것이다. 학생들 역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도록 하는 자율적인 교육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경쟁이 판을 치고 억압이 난무하는 학교에서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다. 학생인권조례의 필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이유다. 별도의 인권교육도 의미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인권이 살아 숨 쉬도록 유도하는 교육이 절실하다. 모두가 평등한 관계 속에서 민주적으로 자치 규율을 만들고,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이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든 과정은 폭력의 가능성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학생인권조례의 원활한 적용을 비롯해 교육개혁의 기반을 닦기 위해서는 교사 1인당 학생 수를 지속적으로 내리는 방안도 고려해봄직하다. 교육환경의 선진화가 필요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교사 1인당 학생 수는 15~20명이다. 10~15명인 OECD 평균보다 5~10명 정도 높은 수치다. 그만큼 교사가 학생 한 명, 한 명을 보살피고 신경 쓸 여력이 적다는 말이다. 수업준비와 행정업무로 바빠 아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는 교사들의 인터뷰가 이를 대변해준다.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줄어든다면 교사가 학습과 생활에서 책임지는 학생의 수가 그만큼 줄어들게 되므로 학생 개인의 특성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아이들 사이의 관계를 면밀히 관찰하는 과정은 학교 폭력을 줄이는 첫 단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상담교사를 두는 것과는 별개로 일상생활에서 교사와 학생 사이의 인간적인 관계와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학교폭력 예방을 위한 필수과정이다.

또한 교사 한 명이 책임지는 아이가 줄어들면 인성 교육뿐만 아니라 사실상 사교육에 내던져진 교과 교육에 있어서도 공교육의 책임과 역할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교사가 많아진다는 것은 다양한 교과목의 교사들이 보다 다양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의미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선행학습이 필요한 아이 혹은 학습에서 조금 뒤처지는 아이도 공교육의 테두리 안에서 효과적인 교육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학생과 학부모가 사교육의 필요성을 덜 느끼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더 많은 청년 일자리도 생겨난다. 저출산 현상으로 전체 학생 수가 줄어든다고 해서 그동안 교사 임용에 소극적인 교육당국이었다.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을 나와도 몇 년 씩 임용고시에 매달리는 청춘이 한 둘이 아니다. 더 많은 교사의 채용으로 교육의 질도 높이고 청년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정책적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 모두가 사실상 알고 있었지만, 그냥 지나쳤던 학교 폭력의 실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자살한 학생의 안타까운 사연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는 어른이 많았다. 단기적으로 학생의 원한을 풀어주는 일은 폭력에 가담한 학생들에 대한 처벌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학생들에게 겁을 주는 것에 불과하다. 왜 폭력이 나쁜 것인지, 인간의 존엄성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 근본적으로 깨닫지 못한다. 진정한 교육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교육 당국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의 신뢰를 회복하고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참된 교육이 다시 피어나는 개혁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 고민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