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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대와 경영대를 서성이는 날들 (유혜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7 10:38
조회
606

유혜진/ 객원 칼럼니스트



나는 교육학을 공부한다. 4년 전 수능을 마치고 한참 원서를 작성하던 그 시절, 부모님은 내가 경영학과나 경제학과에 진학하길 원하셨다. 대학 4년 내내 꼬박 3천만 원 가까운 돈을 대학에 헌납해도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일자리 하나 얻을까 말까한 현실 앞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대한민국 부모의 심리였다. 하지만 나는 인문학부에 가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2007년 아직 대부분의 대학에서 학부제가 운영되었던 시절, 우리 학교의 단과대학 구분에 따르면 '교육학과'는 인문학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교육 사회학 분야에 관심이 많던 나였다. 그럴 바에야 임용고시에 유리한 사범대나 교대에 가라는 부모님의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철없는' 고집을 부렸다. 조정래의 대하소설 세 질을 한 달 만에 읽어 내려가면서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겠다며 사학과 진학도 진지하게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4년 후, 지금 나는 집과 취업스터디를 오가는 변변치 않은 휴학생에 불과하다. 그때 교대를 갔다면 나는 '최고 신부감'이 될 수 있었을까.

대학 동기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고등학교 시절 윤동주의 감성적인 시어에 푹 빠져 그 후예가 되겠다며 국문학과에 입학한 친구가 있다. 그는 지금 최소한의 효도는 해야겠다며 신림동의 한 원룸에서 행정학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다. 불교철학에 심취했던 또 다른 친구는 4학년이 되자 대학원에 갈 집안 형편도, 기업에 취업하기도 여의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아버지가 '장관'이 아님을 한탄하며 고시촌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했다는 기쁨도 잠시, 대한민국 20대의 혹독한 현실에 정면으로 부닥치고 말았다.

어떤 이들은 입학 이후부터 발 빠르게 움직였다. 이들은 경영학이나 경제학으로 전과해 자신의 학적에서 인문학을 지웠다. 또 다른 이들은 가까스로 이중전공을 할 수 있게 되어 취업시장에 턱걸이했다. 남아있는 몇 명만이, 수강생이 10명 남짓으로 준 전공 수업 강의실의 분위기를 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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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중앙대는 18개 단과대, 77개 학과를 10개 단과대,
46개 학과ㆍ학부로 통폐합하는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물론 이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자면 한없이 개인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시절 더 열심히 공부해서 더 높은 수능배치표에 안착하지 못했음을 탓하는 사람도 있다. 혹자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듣지 않은 자기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예 자본의 논리가 넘실대는 대학의 현실에 적응하는 능력이 부족했음을 스스로 반성하는 것은 어떨까. 여기에 대고 카이스트 서남표 총장 같은 이라면 '노력 없이, 고통 없이, 희생 없이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고 호통 칠지도 모를 일이다.

인문학을 홀대하는 대학과 사회 분위기는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피부로 느끼는 장벽은 높았다. 사회는 철저하게 '기업화된' 인재만을 원했다. 대학은 이에 장단을 맞출 뿐이다. 상경계열 전공자가 아니면 지원조차 할 수 없는 회사가 수두룩하고 그마저도 온갖 스펙으로 무장한 이들의 피 튀기는 전쟁이다.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없는 학과와 학생들은 사회는 물론, 대학 내에서도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해가 갈수록 하는 수없이 전공을 바꾸거나 고시로 발을 돌리는 후배들의 나이가 점점 어려지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90%가 대학을 가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대학이 학생들을 기업에 진출할 산업인력만으로 취급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일일까. '학문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은 진리와 자유의 전당이라 자부하는 대학의 첫 번째 임무다. 하지만 지금 4년의 대학생활은 개인들의 서로 다른 개성과 창의성을 단 하나의 논리로 획일화시키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이는 사회적으로도 자원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폭력에 가까운 처사다. 대학은 자율화가 추진하지만 그 '자율'은 학문과 학생을 위한 자율이 아닌 시장과 자본으로 향하는 자율뿐이다. 빠르게 회계장부를 읽고 마케팅 전략을 세우는 데만 급급한 대학교육 속에서 왜 우리에게는 '스티브 잡스'가 없냐는 하소연은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같은 회사의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숨지고 자살을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각박한 사회 분위기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생으로 사는 것은 힘들다. ‘인문대 학생’으로 산다는 것은 더욱 팍팍한 일이다. 시장논리에 빠르게 편입하는 대학구조 속에서 인간의 역사와 철학, 문학을 논하는 것은 쉽지 않다. 중앙대 등 일부 대학들은 학과 구조조정으로 인문학과를 통·폐합해 실용학문만을 남겨두고 있다. 국문학을 공부하든 철학을 공부하든, 회계학이 대학생으로서 꼭 갖추어야 할 ‘필수교양’이 되었다는 소식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아직 내가 다니는 대학의 인문학과는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점점 후배받기 힘들다는 하소연이 많다.

9월이면 나는 복학해야 하지만 돌아갈 곳이 없다. 1950년대 학교 중앙도서관으로 증축된 이후, 현재 교육대학 건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 곧 철거될 예정이다. 역사적 의미와 함께 '우리'에게는 유일한 터전이었던 건물이 사라진다. 그 자리에는 지하 3층 지상 9층의 최신식 경영관이 들어선다고 한다. 같은 학교 학생들이 최신식 인프라를 갖춘 건물에서 공부하게 된다는 소식은 분명 반갑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학생 공청회는 소리 소문 없이 치러졌다. 그리고 우리는 전교생의 교양수업이 이루어지는 '종합관' 언저리에 2개 층만을 빌려 사용할 것이라는 발표만이 있었다. 씁쓸하다. 학교 안에서도, 또 학교 밖에서도 주변부로 밀려나는 듯한 이 느낌은 우리를 인문대와 경영대 사이 그 어딘가를 서성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