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우리시대

‘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그게 ‘개독교’ 때문이냐?? (김정웅)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4:56
조회
330

김정웅/ 청년 칼럼니스트


지하철은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구도심을 관통하는 1호선이다. 가정용 스탠드부터 셀카봉, 어깨결림용 파스, 팔토시 같이 특별한 공통점도 없는 다양한 종류의 제품을 판매하는 이동상인이나, 척 봐도 불편해 보이는 몸을 이끌고 모 복지관의 비참한 상황을 삐뚤빼뚤한 글씨로 빼곡히 적은 메모를 돌리는 사람 등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다양한 군상들 중에는 한국에서 기독교에 대해 나쁜 인식을 갖게 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부류의 사람들도 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주 예수를 믿으라”를 끊임없이 외치는 그들. 말하자면 현대 한국에 나타난 ‘순교자’들이다.


‘순교자’의 유형은 다양하다. 옆구리에 성경을 끼고 목청 크게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갈 것이라 일갈하는 ‘마르틴 루터’형, 건강이 염려되는 외양을 가진 가녀린 노파가 한 사람씩 아이컨택을 시도하며 조곤조곤히 그리스도를 믿길 당부하는 ‘마더 테레사’형, 어떻게 저 많은 레파토리를 외웠는지 성경구절과 그 시사점을 쉬지 않고 쏟아내며 주위를 감탄하게 만드는 ‘수다맨’형 등……. 유형은 다르지만 이들 순교자들에겐 한 가지 공통점도 있다. 공격적 선교에 익숙지 않은 대다수의 비교인들에겐 거부감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실제로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들을 마주하면 보통은 시선을 피하거나, 심한 경우엔 혀를 차거나 면전에서 비난을 하기도 한다.


20161012web01.jpg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밤중에 높은 곳에 올라가면 수없이 많은 붉은 십자가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나라. 세계 순위권의 대형교회가 다수 모여 있다는 이 나라. 종교 중 기독교가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이 나라에, 이 열렬한 ‘순교자’들의 포교는 무엇을 이루기 위함인가? 도대체 누가 이들을 보냈단 말인가? 역시 이 나라에 그릇되게 정착한 일부 기독교회가 사회 각지로 조직적인 포교망을 갖추고 파견하는, 소위 ‘개독교’의 하수인들이었던 걸까?


뜻밖에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연히 만났던 어느 목회자는 ‘순교자’들이 한국 기독교회에도 부담이 되는 존재들이라고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한국 교회에서 그런 거부감 드는 포교방식으로 기독교의 교세가 확장된다고 판단했을 리가 없다. 그 목회자는 교회가 그들에게 일정 비용을 지불해가며 “여기여기 가서 ‘예수천국 불신지옥’ 6시간 하고 오세요.”라며 조직적인 파견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의 순교 상당수는 자발적인 행위라는 얘기였다.


조직적인 파견체계도 없이 불쑥 나타나는 ‘순교자’들의 신비. 그럼 이들은 왜 누가 시키지도 않은 그런 수고를 도맡아 한단 말인가? 그 실마리 중 하나는 이들이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내가 마주한 ‘순교자’들은 대체로 거동이 불편하거나, 정상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는 상태라거나 하는 식의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는 이가 많았다. 원만한 경제활동이 어렵고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버린 사람들을 받아주는 우리 사회 몇 군데 안 되는 곳 중 하나가 교회다.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 교회는 오는 사람을 마다하는 법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무겁고 짐진 자들이 교회에 보금자리를 트는 일이라면 더더욱. 로마 시대에 박해받던 이들을 구성원으로 받아준 초대 교회의 정신에 감화된 이들이 순교에 앞장섰던 역사처럼, 현대 한국의 ‘순교자’들은 그렇게 하나 둘씩 시키는 사람 없이도 자발적으로 지하철에, 거리에 나타나 복음을 전파하는데 한 몸 바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사실 소외받는 이들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언제나 존재해 왔다. 시대에 따라 힘든 이들을 품는 주체는 달라져왔고 그 역할을 교회가 맡는 게 꼭 나쁘다고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복지국가’의 개념이 정착된 오늘날 그들을 보듬어야할 1차적인 책임은 국가에게 있다. 국가가 소외 계층을 다시 원만히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리 잡게 해주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에 어쩌다보니 그 역할의 일부분을 교회가 떠안아 버린 것이다. 이에 감화된 이들 일부가 거리로 지하철로 나서며 국가도, 교회도, 시민들도 원하지 않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에 목청 높이는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말하는 ‘지옥’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지옥이 아니라 이 사회의 빛이 닿지 않아 소외된 곳들을 가리키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김정웅씨는 사회와 정치의 소통을 통한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청년입니다.


이 글은 2016년 10월 12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