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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혐의 페미니즘 (박서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4:27
조회
317

박서현/ 청년 칼럼니스트


5월17일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 묻지마 범죄로 끝날 줄 알았던 사건은 남혐 여혐 논쟁으로 번졌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여진 포스트잇은 고인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시작되었지만 혐오범죄 논의를 거치며 상대 이성을 공격하는 무기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점점 과격해진 시위는 5월22일 급기야 ‘남혐·여혐 싫다, 서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내용의 피켓을 든 여중생을 여성시위대가 집단 구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해자가 정신병력이 있던 것으로 밝혀져 위 사건이 남성 전반에 퍼진 여성혐오를 대표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대표성 논쟁과는 별개로 ‘여성 혐오가 사회전반에 도를 넘고 있다’라는 데에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고 있다. 오랜 시간 존재해온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성차별과 억압, 최근에 이르러서는 여성혐오의 경험까지 공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구조적인 여성차별이 분명하게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또한 강남역 살인사건이 사회적 차원의 여성혐오 범죄라는 결론을 내릴지라도)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논리는 다분히 이분법적이며, 사회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 2007년 조승희의 총기난사 사건을 두고 미국의 모든 한국인 유학생이 잠재적 범죄자라고는 단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논리는 어느 지점에서 발생했을까? 여성의 억압과 차별 해결을 위해 남성을 적으로 규정하는 시각은 흡사 2세대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계보를 잇는 것처럼 보인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남성지배구조와 남성우월주의가 여성을 억압한다는 관점을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남성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감은 남성 대 여성이라는 대립구도를 만들고, 페미니즘 운동을 남성에 대한 공격의 도구로 바꾸어 버렸다. 결과적으로 페미니즘의 중요성을 대중에게 이해시키는 데에 실패하였으며, 작년 미국에서는 SNS를 이용한 여성들의 ‘반페미니즘’ 선언까지 일어났다.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역시 핑크 코끼리, 여중생 등 여성혐오 시위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존재했는데, 급진적인 페미니즘의 폭력성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나타내는 단서일 수 있다.


201605191116238549588A_1.jpg강남역 10번출구 추모 쪽지
사진 출처 - 아시아경제


미국의 저명한 페미니스트 바바라 버그는 페미니즘을 이렇게 정의내렸다. “페미니즘은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자유이다. 한정된 역할에서 벗어나는 자유, 사회의 억압적 구속에서 벗어나는 자유, 자신의 생각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자유이다.” 이 정의에 의하면 페미니즘이 극복해야 할 대상은 단순히 남성이라는 존재를 넘어 남성 혹은 여성 스스로조차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제도적, 규범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억압’이다,


남성은 페미니즘의 장애물이 아니며, 페미니즘의 성공을 위해 여성은 물론 남성의 공감 또한 필요하다. 크게 2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여성집단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페미니즘 담론은 남성집단의 자발적인 자성과 행동변화를 유도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정치적 설득력에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표적인 움직임으로 엠마 왓슨이 홍보대사로 위촉되어 유명해진 ‘he for she’캠페인이 있는데, 남성들 역시 그들의 어머니, 여동생, 배우자 등을 위해 페미니즘에 동참해줄 것을 독려한다.


둘째, 페미니즘을 통해 남성 역시 성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며 이때 남성은 페미니즘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페미니즘을 ‘보수적, 억압적 성적규범으로부터의 자유’로 정의한다면, 페미니즘은 ‘호전적인 남성’, ‘경제적 책임자로서의 남성’과 같은 성적규범으로부터의 자유 또한 포함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 공동체 내부에서 여성만이 보수적 성적 규범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남성 성역할에 관한 고민은 필수적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양육자로서의 어머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공동 양육자인 아버지’가 동시에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남성 또한 ‘가장으로서의 아버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일반 여성이 참여하는 여성시위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 시위가 ‘살女주세요, 넌 살아男았잖아’와 같이 성적 대립구조를 부추겨서는 제자리걸음만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남성이 여성의 잠재적 조력자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손을 내밀 때 페미니즘은 더 큰 타당성과 행동력을 갖게 될 것이다. 사건 발생 이후 현재 7일, 강남역 살인사건은 계속 주요 보도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다. 페미니즘을 ‘포지셔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섬세한 전략이 필요하다.


박서현씨는 노동과 정치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


이 글은 2016년 6월 1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