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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K의 천막 (남소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3:57
조회
400

남소연/ 청년 칼럼니스트


K가 학교에 천막을 쳤다. 때는 학교 가을 축제가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캠퍼스 한 가운데 서는 디스코 팡팡과 바이킹이 떠들썩하게 운행됐다. 학생들은 축제를 즐기기 위해 거리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바로 그때다. 삼겹살 굽는 연기가 시야를 방해하는 천막 옆에서, 에이드 값 흥정하는 소리가 쟁쟁한 천막 옆에서, K는 자리를 펴고 앉았다. 어느덧 한 달이 넘어섰다.


K가 쓴 대자보 몇 장이 발단이다. 올해 초부터 학교 건물에 대자보가 붙여졌다가 떼어지곤 했는데 일이 제법 커진 모양이다. 세월호 참사부터 시작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생각을 몇 자 글로 풀어 쓴 게 전부지만, 게시 자체를 거부당한 적도 있다. 붙이고, 거부당하고, 또다시 붙이기를 수차례. K는 대자보를 붙이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선, 승인도장이다. 게시물 관리를 담당하는 학생회의 승인도장이 없으면 대자보는 떼어진다. 둘째, 분량이다. 그 어떤 생각도 전지 한 장을 넘어서는 안 된다. 게시판이 협소하기 때문에 전지 한 장 이상의 대자보는 타 학생들의 표현할 자유를 빼앗는다는 것이 그 이유다. 셋째, 정치적이거나 학교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서는 안 된다. 학내 구성원들이 불편해한다는 것이 학생회의 입장이다. 마지막, 학생증을 제시해야 하고, 이름과 전화번호를 대자보에 명시해야 한다. 소개팅에서나 요구할 법한 개인 정보를 무슨 이유로 꼬치꼬치 캐묻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실제로 학생회가 내뱉은 말들이다. 비록, 불법일지라도.


20151104web03.jpg후배 K는 학교 도서관 앞에 천막과 간이 게시판을 세웠다.
사진 출처 - 필자


학생(학생회)이 학생(K)을 검열하는 아이러니는 학교의 교칙에서 태동한다. 학생들이 게시물을 부착할 땐, 학교의 권한을 위임받은 학생회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행여 무분별한 게시물이 학교의 미관을 해칠지도 모르니, 최소한의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관리’라는 이름이 K의 입을 가로 막았다. 어찌됐든 그 관리 덕에 학교 게시판에는 기업의 홍보 게시물만 덕지덕지 남아 있다. 대기업 신입사원 모집 게시물부터 새로 출시된 자동차 광고물, 학원 홍보물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학생들의 목소리는 그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학교는 언제나, 참으로 조용하다.


K는 사실, 학교가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자보가 떼어지는 순간에도, 천막을 치는 순간에도 학교의 눈치보다는 학생들 사이의 눈총이 따가웠을 터다. 악의적인 비난과 불편한 시선 가운데서 K는 묵묵히 천막을 지켰다. 다만, 서로 제 할 말 조금씩 내뱉으면서 시끄러워 지자고, 적어도 말하는 사람을 불편해하지 말자고 외칠 뿐이다. 주장하고, 반박하고 또다시 반박하는, 그 엎치락뒤치락 하는 과정 속에서 배움이 있다고 믿는 듯 했다.


K는 나와 같은 수업을 들으며, 인간의 절반은 표현이라는 한 교수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의 절반을 찾기 위해 오늘도 K는 천막 행이다. 며칠 전에는 직접 나무판대기로 간이 게시판을 만들기도 했다. 이제는 대자보의 크기도 내용도 가로막는 이 없다. K는 단과대학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일 적 보다 몸과 마음이 수월하다며 너스레 떤다. 간이 게시판이 하나 둘 늘어나자 그곳에 다른 학생들의 대자보가 더해지고 있다. 조용한 학교에 별안간 K의 천막이 들어섰다.


남소연씨는 소수자와 약자를 대하는 언론의 문제점을 느끼고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신문 모니터링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5년 11월 4일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에 실렸습니다.